시선

그늘의 발달 / 문태준

주선화 2008. 7. 23. 14:18

그늘의 발달  /문태준

 

 

아버지여, 감나무를 베지 마오
감나무가 너무 웃자라
감나무 그늘이 지붕을 덮는다고
감나무를 베는 아버지여
그늘이 지붕이 되면 어떤가요
눈물을 감출 수는 없어요
우리 집 지붕에는 폐렴 같은 구름
우리 집 식탁에는 매끼 묵은 밥
우리는 그늘을 앓고 먹는
한 몸의 그늘
그늘의 발달
아버지여, 감나무를 베지 마오
눈물은 웃음을 젖게 하고
그늘은 또 펼쳐 보이고
나는 엎드린 그늘이 되어
밤을 다 감고
나의 슬픈 시간을 기록해요
나의 일기(日記)에는 잠시 꿔온 빛
-「그늘의 발달」

어디서 고부라져 있던 몸인지 모르겠다
골목을 돌아나오다 덜컥 누군가를 만난 것 같이
목하 내 얼굴을 턱 아래까지 쓸어내리는 이 큰 손바닥
나는 나에게 너는 너에게
서로서로 차마 무슨 일을 했던가
시절 없이
점점 물렁물렁해져
오늘은 두서가 더 없다
더 좋은 내일이 있다는 말은 못하겠다
-「눈물에 대하여」

두꺼비가 지렁이를 잡아먹고 있었다
둥근 두꺼비가 긴 지렁이를 삼키고 있었다
지렁이의 긴 하체를 두꺼비의 짧은 앞다리가 팽팽하게 잡아 한참을
지렁이의 버둥거리는 몸을 끈적끈적한 입으로 물고 다시 한참을
지렁이의 축축한 배가 두꺼비의 등 속으로 서서히 들어가는 이 아침
덜컥도 없이 슬금슬금 미끌미끌하게 들어가는 이 한참
그늘이 그늘을, 그늘의 생활이 그늘의 생활을
마저 넣고 입을 꼬옥 막고 눈을 돌리고 나를 바라보는 이 한참
두꺼비가 나에게 똑같이 가까이 가까이로 다가오는 이 한참
-「덜컥도 없이 너는 슬금슬금」

배를 깔고 턱을 땅에 대고 한껏 졸고 있는 한 마리 개처럼
이 세계의 정오를 지나가요
나의 꿈은 근심 없이 햇빛의 바닥을 기어가요
목에 쇠사슬도 느슨하게 정오를 지나가요
원하는 것은 없어요
백일홍이 핀 것을 내 속에서 보아요
눈은 반쯤 감아요, 벌레처럼
나는 정오의 세계를 엎드린 개처럼 지나가요
이 세계의 바닥이 식기 전에
나의 꿈이 싸늘히 식기 전에
-「엎드린 개처럼」

이 밤에 알 수 없다, 마음이 홀로 사는 곳을
앵초꽃의 보라를 보다가 거북이의 등에 거북이가 올라타는 것을 보다가
문득 이 밤에 진흙 속에 사는 진흙게를 생각하게 되는 이유를
늙은 여자의 몸 같은 갯벌의 몸을 더듬게 되는 이 관능을
그 뻘구멍에 마음이 살고 있는가 질문하며 뻘구멍을 파들어가는 이 시간의 손을
마음이여, 무슨 이유로 네가 그곳에서 뻘물을 마시면서 살고 있겠는가
음란하고 물컹물컹한 진흙의 무희를 네가 사랑할 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진흙벽과 흘러내리는 진흙지붕과 진흙밥과 다발이 없는 진흙꽃과
한 번도 말하지 않은 진흙말과 진흙입맞춤과 미소가 적은 진흙아침과 진흙하늘과
태아처럼 몸이 나뉘지 않은 진흙허파와 진흙허벅지와 진흙발과 동공이 없는 진흙눈과
그리하여 세계가 한 덩어리의, 혹은 흐물흐물해서 쥘 수 없는 진흙이라는 너의 인식을
이 밤에 알 수 없다, 마음은 진흙 속 한 마리 진흙게라는 나의 비유를
진흙에는 주소가 없으므로 너를 결코 만날 수 없을 걸이라는 너의 비유를
물의 시간도 흙의 시간도 아니요, 완고함도 유순함도 아닌
다만 있다,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곳
흥건하게 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곳
진흙우박들이 흘러내리고 진흙계절들이 밀려와 덮는, 그리하여 아무도 우리의 출생을 증명할 수 없는 그곳
마지막까지 누구의 종교로도 구원할 수 없는 그곳
마음이여, 무슨 이유로 네가 그곳에 진흙의 은자(隱者)로 살고 있겠는가
이 밤에 알 수 없다, 뻘구멍을 파들어가 만나게 된 이렇게 끝나게 된 진흙문장을
-「뻘구멍」

사랑의 농원에 대하여
생각하였느니

나는 나로부터 변심하는 애인

나의 하루와 노동은 죽은 화분에 물을 부어주었느니

흘러 흘러갔어라,
먼 산 눈이 녹는 동안의 시간이

죽은 화분에 물을 부어주었느니

풀이 사라진 자리에
다시 풀이 와
어떤 곳으로부터 와

풀은 와서 돋고
몸이 커지고 스스로
풀꽃을 피우고 문득
여인이 되었어라

수심(愁心)을 들고 바람 속에 흔들리거나
내가 돌아앉으면
눈물을 달고 어룽어룽 내 뒤에 서 있었어라

어디로부터 왔느냐
묻지는 않았으니
누구도 나에게 그렇게 묻지 않았듯이

우리는 이 화분을 들고
앞서고 앞서서 가거나
늦추고 늦추어서 갈 뿐

우리는 이 화분을 들고
서로에게 구름 그림자처럼 지나가는 애인
나는 나로부터 변심하는 애인

그러하니 사랑이여,
우리가 만나는 동안은
샘물을 길어서
주름을 메우고
서로의 목을 축여다오
-「화분」

 

 

*2008 시집 그늘의 발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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