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묻어간다는 말 / 구판우

주선화 2023. 12. 5. 11:19

묻어간다는 말 

 

-구판우

 

 

묻어간다는 말은 식탁에서 파생된 자동사일까

 

식탁은 입맛을 홀리는 무덤이다

끼니마다 다소 빈약해 보여도 육체를

거스르는 법이 없다

문 걸어 잠그는 일 없이 곧이곧대로 묻어간다는 말이다

 

콩나물은 다소 예외이기는 하나

삼키는 데 무리가 없고, 소화하는데 힘들이지도 않는다

삼킬수 있다는 말, 한통속으로 묻어가는데 괜찮다는 말

묻어가는 일에는 갑론을박이 있을 수 없고

시시비비 없이 묻어간다는 말,

사람 냄새가 폴폴 묻어나는 맛있는 단어라서

갈비를 굽거나

봄동에 쌈장, 뭇국을 끓여놓든

충무김밥을 쌓아놓든

한 마당에 섞이고 버무릴 줄 안다

식탁은 몸과 그렇게 하나로 묻어가는 중이다

완장 찬 공무원이거나 미용사, 목회자

여행자든 행려병자든

허기진 배를 채우려 들이대나 손사래 치지 않는다

빈속을 채운 다음에는 무조건 묻어가는 법

하늘처럼 넉넉한 품이 아니어도

품은 그대로 또 하루를 묻어가고

 

반색하는 몸은 끼니마다 황홀한 식탁에 묻어간다

 

 

* 구판우 시집 「청소부 나라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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