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추천 100

사평역에서 / 곽재구

주선화 2008. 1. 9. 10:28

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항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낮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면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 1981년)

 

 

 

*조그만 간이역에 눈은 푹푹 내려 쌓이고 푹푹 내려 쌓이는 눈 때문에

막차는 오지 않는다. 시계는 자정을 넘어서고

시대적 아픔을 서정적으로 그려냈다고 평가되는 곽재구시인의 데뷔작

읽을때마다 울컥한다, 아름다우면서도 서럽고 힘들지만 따뜻했던 그때 그 시절의 풍경 흑백사진처럼 남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