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1983년>
* 시름 많은 사람들과 "어두운 땅 한 평 가꾸다 갈래요/ 우리나라 하늘 한 평 비추다 갈래요"라고
노래했던 시인 고정희,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마치 그녀가 상한 영혼의 곁에 앉아 작은 목소리로
"흙에 심은 뿌리 죽는 법 보았나요" 묻는 것 같다
고정희 시인은 한 생애를 정열적으로 살다 간 여성운동가이기도 했다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지녔고, 여성주의 문화집단인 ' 또 하나의 문화' 창립 동인으로 활동했다
1991년 6월 지리산 뱀사골을 오르다 폭우로 불어난 물에 휩쓸려 생을 마감했다.
지리산의 봄 1 ㅡ 뱀사골에서 쓴 편지가 자꾸 떠오른다
"아득한 능선에 서 계시는 그대여/ 우르르우르르 우뢰소리로 골짜기를 넘어가는 그대여/
(....) 아름다운 그대 되어 산을 넘어 갑니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승천합니다."라고 쓴 시
그녀의 시를 읽고 있는 오늘 새벽은 내 가슴이 아프다 (문태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