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상

2008 년 불교문예 신인상

주선화 2008. 3. 19. 22:01

2008년 상반기《불교문예》신인상 시부문 당선작

 

 

탱자나무 울타리 집에 대한 추억 / 박성희

 

 

  텃밭이 있던 작은 집, 탱자나무 울타리 가시를 세우고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런 때면 참새들이 탱자나무 가시를 뚫고 우르르 날아올랐다.


  이사 온 첫날, 아궁이에 가득한 물을 퍼내던 어머니의 눈빛은 맑게 젖어 있었다. 빈터가 흉터로 보였는지 이튿날부터 어머니는 빈 땅마다 나무를 심었다. 묘목장수도 버린 못난 나무들을 주워오던 날, 집 잃은 강아지 한 마리도 나뭇잎처럼 바람에 쓸려왔다.


  텅 빈 여름엔 소낙비가 마당을 싸리비질하기도 했다. 싸리비질은 밥알을 등에 지고 가던 개미들의 순례 길을 먼 곳으로 바꿔놓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나도 개미들과 함께 길을 잃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젖은 머리카락을 빗질하듯 한 올 두 올 빗소리를 헤아리곤 했다.


  애야, 옛날에 가시 면류관을 쓴 사내가 있었단다. 가시를 쓰고 세상을 품은 사내가 있었단다. 예수뎐을 뒤적이며 나를 일으켜 세우던 아버지의 목소리는 늘 젖어 있었다.


  새벽마다 탱자나무 울타리에 내려앉은 참새들은 탱탱탱, 내 늦잠을 깨웠다. 가시에 찔린 바람이 나무의 둥근 허리를 때리기도 했고, 구멍 난 문풍지를 우우우 울게도 했다. 풍뎅이가 마당을 쓸고, 쐐기가 불총을 놓고, 땅바닥에 종기종기 엎드린 채송화가 공터 가는 길을 환히 밝혀주기도 했다.


  노을이 지면 아궁이 속에선 탱자나무가 환하게 탔다. 굴뚝 위로 풀어져 나오던 저녁연기는 모람모람 언제나 하늘 끝으로 멀어져 갔다.

 

 


오동나무 옷장 / 박성희

 

 

  엄마의 머리맡에는 옷장이 있다. 항상 네 귀를 세우고 자신의 안을 향해 골똘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옷장.


  엄마는 이 옷장 속에 옷만 넣는 것이 아니다. 자식들이 조금씩 드리는 용돈도 버선 속에 둘둘 말아 넣고, 묵은 편지나 사진첩을 넣어 두기도 한다. 내가 태어나 처음 입었던 배냇저고리도 아직 엄마의 젖 냄새를 품은 채 곱게 접혀져 있다.


  비 듣는 소리에 귀 쫑긋대는 오동나무 너른 잎사귀처럼 옷장에 가만히 귀를 대본다. 오동나무 둥근 뿌리가 물을 길어 올리듯 우물물을 길어 올리는 어머니, 텅 빈 항아리 가득 물 차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캄캄한 밤이 오면 엄마는 가끔 이 우물 속으로 들어간다. 두레박줄처럼 풀어놓은 실 꾸러미를 들고, 자신의 울음에 찰랑 닿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오동나무 목마른 뿌리를 찾다가 아침 햇살에 끌려 돌아온다.


  엄마가 시집올 때 가져온 비밀의 방, 오동나무 옷장에서는 아직도 나뭇잎 서걱대는 소리가 들린다.   

 

 

 

아스팔트 위의 암사마귀 / 박성희

 

 

주름조개풀 같다.
비단 주름치마의 겹 날개 속
암사마귀, 탱탱 부푼 배 감싸고 있다.
흙바람 이는 아스팔트 길
무거운 배의 아래 일자로 뻗은 다리
가늘가늘 떨고 있다.
일생에 한번 뿐인 성찬을 마치고
땅으로 내려오다 길을 잃었나.
남편 잡아먹고 보험금 타먹은 년이라고
손가락질 받을수록
살아야 할 힘이 솟아난다. 아니
수컷을 삼킨 암사마귀처럼 길을 잃고 만다.
삶은 사람들의 억지소리에 더 간절해지면서도
길은 아득히 멀어진다.
병원 앞 아스팔트 길,
타이어 타는 냄새 속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저 여자!
퉁퉁 부푼 배를 안고
위태롭게 길을 건너는 저 여자!
연둣빛 말간 새끼들 보글보글 쏟아내고
한 잎 낙엽으로 부서져 가고 있는 암사마귀를
호박잎으로 감싼 뒤
싸리꽃 피어 있는 무덤가에
천천히 내려놓는다 저 여자 한 발 한 발
움직일 때마다 풀잎들, 길을 연다.

 

 

 

늙은 팽나무 / 박성희

 

 

명옥헌의 늙은 팽나무가
돌개바람을 불러 드렸나.
저 혼자 최후를 맞이하기 위해
산정을 오르는 짐승의 고독을
팽나무 저도 알고 있었을까.
마침내 군청 직원은 명등을 내걸고
밑동에 전기톱을 들이밀었다.
제 삶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툭, 생을 놓아버린 팽나무!
하얀 살의 온기가 눈부셨다.
평생을 한 자리에
못 박혀 있었던 나무의 이력이
둥글둥글 피어났다.
피어난 자리에서 생목의 향기가
수도관을 뚫고 나온 물처럼
콸콸콸 쏟아져 나왔다.
욕심껏 들이마신 숨을 따라
팽나무의 향이 몸속으로 번져갔다.
명옥헌 연못 위 그림자도
제 몸 가볍게 흔들어댔다.

 

 

 

소나무 분재 / 박성희

 


철사 줄로 묶어 놓은 소나무
옥죄인 방향을 따라 가지들 꿈틀거린다.
햇살까지 비명을 지르며 꺾인다.
밑둥을 타고 오르는
줄기조차 비틀어진다.
벗어나고 싶으나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자
소나무는 살을 파고드는 쇠
껴안기 시작한다. 굽을 대로 굽은
소나무는 꿈틀거리는 제 가지 끝을
바람 자는 능선이라고 꿈꾸기도 한다.
능선을 닮은 어느 가지에서는
산짐승들이 목을 축일
샘물을 더듬기도 한다.
이두박근 삼두박근 불거져 나온
소나무의 근육 위로
개미 한 마리 지나간다.
자꾸만 몸 비트는 소나무는
모든 걸 기억하고 있다.
팔부 능선쯤에서 돌연 깎아 지르는 계곡,
바람과 구름과 새소리를 찾아
갈래갈래 허공에 길을 뻗고 있는 소나무
쏴~ 솔 향이 푸른 여울 물소리를 낸다.
옷깃에 스민 여울 물소리
칭칭 몸을 감아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