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선화 2008. 3. 20. 17:44

봄/ 최승자

 

 

동의하지 않아도

봄은 온다.

삼십삼 세 미혼 고독녀의 봄

실업자의 봄

납세 의무자의 봄.

 

봄에는 산천초목이 되살아나고

쓰레기들도 싱싱하게 자라나고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이

내 입안에서 오물이 자꾸 커 간다.

믿을 수 없이, 기적처럼, 벌써

터널만큼 늘어난 내 목구멍 속으로

쉴 새 없이 덤프 트럭이 들어와

플라스틱과 고철과 때와 땀과 똥을

쿵 하고 부려놓고 가고

 

내 주여 네 때가 가까웠나이다

이 말도 나는 발음하지 못하고

다만 오물로 가득찬 내 아가리만

찢어질 듯 터져 내릴 듯

허공에 동동 떠 있다.

 

 

봄/이윤학

 

흰나비가 바위에 앉는다

천천히 날개를 얹는다

 

누가 바위 속에 있는가

다시 만날 수 없는 누군가

바위 속에 있는가

 

바위에 붙어

바위의 무늬가 되려 하는가

 

그의 몸에 붙어 문신이 되려 하는가

그의 감옥에 날개를 바치려 하는가

 

흰나비가 움직이지 않는다

 

바위 얼굴에

검버섯 이끼가 번졌다

갈라진 바위틈에 냉이꽃 피었다

 

 

 ♡

어김없이 봄이 왔다. 봄이 오긴 왔는데 저마다 같은 봄일 수가 없다. 그래서 봄이다. 자, 여기 두 개의 봄이 있다. 하나는 흰나비 한 마리가 갈라진 바위틈에 냉이꽃을 피우는 이윤학의 봄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삼십삼 세 미혼 고독녀의 봄, 실업자의 봄, 납세 의무자의 봄 그리하여 동의하지 않아도 오는 최승자의 봄이 있다.

 

누가 바위 속에 있는가/다시 만날 수 없는 누군가/바위 속에 있는가, 라는 언술이 강한 울림으로 와 닿는 이윤학의 봄은 사랑의 힘이다. 이윤학 만이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의 위력이다. 이에 최승자의 봄은 터널만큼 늘어난 내 목구멍 속으로/쉴 새 없이 덤프트럭이 들어와/플라스틱과 고철과 때와 땀과 똥을/쿵 하고 부려놓고 가는, 봄이다. 사랑은커녕 오물로 가득 찬 내 아가리만/찢어질 듯 터져 내릴 듯/허공에 동동 떠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그러니까 지금 이 나라 돌아가는 꼴 같은 빌어먹을(?) 봄이다.

 

그렇다면 내게 온 봄은? 대답을 하기 싫어 아니, 이윤학의 봄도 최승자의 봄도 아니어서 별 할 말이 없어 폴 발레리의 산문 한 줄을 읽었다.

-예술가는 조악하고 평범한 허상들로부터 조금씩 벗어나 자신의 미덕에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엄청난 작품들을 얻어낸다. 그 냉혹한 선택은 세월을 잡아먹고 완성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정신은 어떤 것도 스스로 완성시키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말라르메를 만나다>중에서

[출처] 봄을 말하는 법|작성자 마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