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상

미당 문학상 수상후보작 8

주선화 2008. 8. 27. 10:11

제8회 미당문학상 수상후보작 8

 

 

돌층계 / 장석남

 

 

 

저무는 돌층계를 위에서 바스듬히 내려다보면
저 아래는 결코 흙마당이건만
철썩이는 붉은 꽃바다가 있는 것만 같아요
멀찍이 이만큼 서서 바라보니 다행이지
무슨 멀미나는 운명들이 생겨나듯
풀잎들 노을을 이고 마당가를 철썩여요


막돌들을 업어다가 안아다가 놓고, 놓고, 놓고
또 두어 뼘을 재서 큰 모판이라도 밀어가듯이 판판히
놓고 하여서
서너 층게를 만들었더니
오르락내리락 종교와도 같은, 믿음과도 같은 리듬이
생겨났습니다
배고픈 김에 묵은 김치 한 보시기나 며느리 몰래 먹고
물 마시고 나앉듯
무끈히 힘 �며 올린 산들 하나는 꽃 한번 피고 지니
그대로 그렇게 본토박이 할아버지가 되어 있습니다


이마에 자꾸 주름 잡히어
거울 보며 손가락으로 주름 펴면서도
돌층계 아래로는 여전히
꽃바다가 와서 수군대는 것 같아요

 

 


 “돌층계를 만드는 건 시를 짓는 작업”


장석남의 ‘석’이 혹 ‘돌 석(石)’자 아니냐고 농을 걸었다. ‘주석 석(錫)’자라 답하는 시인의 얼굴이 환했다. 돌을 참 좋아하는 시인이다. 갈팡질팡 고민 끝에 대표작으로 택한 시도 ‘돌층계’다.


“돌은 아름다워요. 어떤 디자인도 따를 수 없죠. 또 돌이 나이를 많이 먹었잖아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가장 밀접한 자연적 사물이면서 그 안엔 가장 민감한 시간이 함축돼 있죠.”


가장 오래된 물건. 그런 돌을 날라 층계를 만든다. ‘오르락내리락 종교와도 같은, 믿음과도 같은 리듬이 생겨’나니, 돌층계를 만드는 건 곧 시를 짓는 행위가 된다. 돌층계 앞엔 ‘붉은 꽃바다’가 너울댄다.


“옛날 정원은 바위를 놓고 그 앞에 꽃을 심어 영원성과 일시성의 조화를 이뤘어요. 사실 바위도 꽃인데, 큰 꽃 앞에 작은 꽃이 있는 셈이죠.”


그의 시 세계도 돌과 꽃이 어우러진다.


‘한옥 짓는 마당가/널빤지 위에 누워 낮잠 들어가는 대목수의 꿈속으로 들어가/잠꼬대의 웃음으로 배어나오는/작약 밭의 긍정, 긍정, 긍정, 긍정’(‘문 열고 나가는 꽃 보아라’ 중)


그늘 한점 없이 환한 시, 서정만을 노래하는 시, 마냥 긍정하는 시에 마음이 환해진다. ‘긍정, 긍정, 긍정, 긍정’ 따라 읽다보면 입술 사이로 작약 꽃이 피는 듯하다.


‘작약 싹 올라온다/작약꽃이 피어 세상을 보다가/떨어질 것을 생각한다’(‘작약’ 중)


시인은 근래 작약을 심었다. 비단처럼 겹겹이 싸인 꽃잎이 꼭 눈동자 같은 꽃.


“작약이 뭘 보러 와서 뭘 보러 갈까. 비밀스러운 건 꽃 속에 다 숨겨두면, 꽃이 매번 피어서 그 얘기를 해주지 않을까.”


시의 세상에선 사람만 꽃을 보는 게 아니라, 꽃도 사람을 본다는 게다.


시인은 ‘촛불의 千手千眼’이란 시에서 ‘지금/맨손바닥 위에 촛불이 한 그루 떠 있다/맨손바닥 위에 촛불이 한 포기 떠 있다/맨손바닥 위에 촛불이 한 송이 떠 있다’고 노래했다. 불은 예쁜 꽃이다. 불꽃은 부뚜막에 뿌리가 닿는다. 인간이 태초에 불을 다스리기 시작한 곳이다.


‘그녀가 가진 첫 방은 부뚜막이었다 한다’(‘부뚜막 방’ 중)


무엇이든 집어삼킬 수도 있을 무서운 불은 부뚜막 안에선 어미 무릎에 기댄 듯 얌전해진다. 어머니가 평생 가장 오래 머물렀을 공간. 어머니 품처럼 따뜻한 장소다.


‘천정이 꺼멓게 그을린 부엌 찬 부뚜막에 수십 년을 앉아서 나는/고구려 사람처럼 현무도 그리고 주작도 그린다/그건 문자로는 기록될 수 없는 서룬 사랑이다’(‘부뚜막’ 중)


현무·주작이 벽화로 남아있는 고구려 무덤처럼 불을 땐 세월만큼의 그을음이 벽화가 된 어머니의 부엌. 어린 시절의 시인은 온기 남은 부뚜막에서 어머니의 체온을 느끼며 부지깽이로 그림을 그렸을 게다. 그런 부뚜막도 결국 돌이다. 시인에게 돌은 꽃이요, 불이며, 부뚜막이었고, 또한 어머니의 사랑으로 함축된 세월을 아로새긴 시(詩)였다.


(글=이경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