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상

동서 커피 - 동상 2

주선화 2008. 10. 22. 16:46

  붉은 칸나가 피는 이맘 때

 

 

햇빛을 한 잔의 맥주처럼 잔뜩 들이 킨

붉은 칸나가 길섶을 휘휘 저으며 비틀거리고 있다.

누군가 뜯다 내버린 붉은 칸나 꽃잎이

상처에서 흘린 핏빛처럼 처연하다.

 

그는 앞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내게 무슨 말인가를 했다.

그의 목소리는 빙글빙글 돌아 공중으로 분해되었다.

자꾸 붉게 올라가는 꽃대만 망연히 바라보고 싶었다.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묻는 대신 꽃의 주름만 만지작거렸다.

소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지상에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한 생에 단 한번뿐일까? 골똘히 나는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다.

붉은 칸나는 꽃 위에 꽃을 더 자꾸 피워 올리고 있었다.

 

온몸으로 화들짝 감각이 불타올랐다.

잊은 지 오래된 정념의 깃발도 다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불혹의 나이에 난파된 배처럼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가혹한 운명이려니 수긍하기로 했다.

내가 흔들리다 부서지기 전에 그는 날개를 달고 떠났고

나는 그를 더 이상 흔들지 않기 위해 침묵했다.

붉은 칸나가 피는 계절이 오면

오래된 이야기 가슴에서 비워내지 못해

한 잔 술에 거나해서 거리를 갈지자로 걷는다.

붉은 칸나는 만나면 꺼이꺼이 울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