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나무 한 권의 낭독

주선화 2009. 6. 15. 12:32

나무 한 권의 낭독 / 고영민

 

 

바람은 침을 발라 나무의 낱장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다

언제쯤 나도 저러한 속독을 배울 수 있을까

한 나무의 배경으로 흔들리는 서녁이

한 권의 감동으로 오래도록 붉다

얼마나 읽고 또 읽었으면

저렇게 너덜너덜 떨어져나갈까

이 발밑의 낱장은 도대체 몇 페이지였던가

바람은 한 권의 책을 이제

눈 감고도 외울 지경이다

또 章들이 우수수, 뜯겨져나간다

숨진 자의 영혼이

자신의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듯

바람은 제 속으로 떨어지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손바닥으로 받아들고

들여다보고 있다

낱장은 손때 묻은 바람 속을 날다가

끝내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밟힌다

철심같이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인적 드문 언덕에 구부정히 서서

재본된 푸른 페이지를 모두 버리고

언 바람의 입으로 나무 한 권을

겨우 내 천천히 낭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