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이건청 대표시

주선화 2009. 9. 16. 14:08

말향고래를 찾아서 / 이건청

 ㅡ 노래하는 짐승

 

 

 고래는 고래끼리 모여 고래끼리만 알아듣는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낮은 음역에서 부르는 고래들의 노래는

동백꽃 핀 붉은 벼랑이 이우는 꽃들을 툭 툭 떨어뜨리듯, 적막하게 어울

리기도 하고, 아지랑이 흐드러진 반야봉 산골짝 마가목 새순 돋듯 윤기

흐르는 합창이 되기도 한다고 하는데, 바다가 자고 물결도 혼곤해진 밤,

남극의 고래가 부르는 사랑 노래를 북극의 고래가 화답하기도 한다고

한다.

 

(나 같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너희들을 죽이지 않겠다.*)

 

* 김종삼 시 중에서

 

 

 

멸치

 

내가 멸치였을 때,

바닷속 다시마 숲을 스쳐 다니며

멸치 떼로 사는 것이 좋았다.

멸치 옆에 멸치, 그 옆에 또 멸치,

세상은 멸치로 이룬 우주였다.

바닷속을 헤엄쳐 다니며

붉은 산호, 치밀힌 뿌리 속으로 스미는

바닷속 노을을 보는 게 좋았다.

 

내가 멸치였을 때,

은빛 비늘이 시리게 빛났었다.

파르르 꼬리를 치며

날쌔게 날리곤 하였다.

싱싱한 날들의 어느 한끝에서

별이 되리라 믿었다.

핏빛 동백꽃이 되리라 믿었었다.

 

멸치가 그물에 걸려 뭍으로 올려지고,

끓는 물에 담겼다가

채반에 건져져 건조장에 놓이고

어느날, 멸치는 말라비틀어진 건어물로 쌓였다.

그리고, 멸치는 실존의 식탁에서

머리가 뜯긴 채 고추장에 찍히거나,

끓는 냄비 속에서 우려내진 채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내가 멸치였을 때,

별이 되리라 믿었던 적이 있었다.

 

 

 

 

소금

 

 폭양 아래서 마르고 말라, 딱딱한 소금이 되고 싶던 때가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쓰고 짠 것이 되어 마대 자루에 담기고 싶던 때가

있었다. 한 손 고등어 뱃속에 염장질러 저물녁 노을 비낀 산굽이를

따라가고 싶던 때도 있었다. 형형한 두 개 눈동자로 남아 상한 날

들 위에 뿌려지고 싶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 딱딱한 결정을 버리고 싶다. 해안가 함초

숲을 지나, 유인도 무인도를 모두 버리고, 수평선이 되어 걸리고

싶다. 이 마대 자루를 버리고, 다시 물이 되어 출렁이고 싶다.

 

 

 

산양

 

 아버지의 등 뒤에 벼랑이 보인다. 아니, 아버지는 안 보이고 벼랑만

보인다. 요즘엔 선연히 보인다. 옛날, 나는 아버지가 산인 줄 알앗다.

차령산맥이거나 낭림산맥인 줄 알았다. 장대한 능선들 모두가 아버지

인줄만 알았다. 그때 나는 생각했었다. 푸른 이끼를 스쳐간 그 산이

물이 흐러고 흘러, 바다에 닿는 것이라고, 수평선에 해가 뜨고 하늘도

열리는 것이라고, 그때 나는 뒷짐 지고 아버지 뒤를 따라갔었다. 아버

지가 아들인  내가 밟아야 할 비탈들을 앞장서 가시면서 당신 몸으로

 끌어안아 들이고 있는 걸 몰랐다. 아들의 비탈들을 모두 끌어안은 채,

까마득한 벼랑으로 쫓기고 계신 걸 나는 몰랐었다.

 

 나 이제 늙은 짐승 되어 힘겨운 벼랑에 서서 돌아 보니 뒷짐 지고 내

뒤를 따르는 낯익은 얼굴 하나 보인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쫓기고 쫓

겨 까마득한 벼랑으로 접어드는 내 뒤에 또 한 마리 산양이 보인다.

겨우겨우 벼랑 하나 발 딛고 선 내 뒤를 따르는 초식 동물 한 마리가

 보인다.

 

 

 

겨울 산에서

 

 나는 겨울 산이 엄동의 바람 속에서 꼼짝도 못하고 서서

겨울밤을 견디고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큰 그늘 속에 빠져 기진해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작은 암자에 며칠을 머물면서 나는

겨울 산이 살아 울리는 장엄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대게 자정을 넘은 시간에 시작되곤 했는데

산 아래, 한신계곡이나 칠선계곡 쪽을 지나 대원사 스쳐 남해 바다로

간다는

지리산 어느 골짜기 돌들이 첫 소절을 울리면,

차츰 위쪽이 그 소리를 받으면서 그 소리 속으로 섞어 들곤 하였는데,

올라오면서 마천면 농협, 하나로 마트 지나 대나무 숲을 깨우고,

산비탈, 마천 사람들의 오래된 봉분의 묘소도 흔들어 깨우면서

골짜기로 골짜기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오를수록 그 소리는 점점 더 곡진한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었는데,

산 중턱을 넘어서면서, 홍송들이 백년, 이 백년씩 그들의 가지로

서로의 어깨를 걸친 채 장대한 비탈을 이루고 있는 곳까지 와서는

웅장한 코라스가 되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내가 사순절의 어느 날, 대성당에 들었던

그레고리 찬트의 높은 소절과 대합창의 어느 부분에 끼어들기도

하는 것 같았는데,

그때마다, 그레고리 찬트 속에서 짐승들의 푸른 안광이 빛나곤

하였다.

겨울 산이 울려내는 대합창이 온 산을 울리다가 서서히 함양 쪽으로

잦아들 때쯤,

건너 쪽, 지리산 반야봉, 제석봉의 윤곽도 밝아오는 것이었는데,

날이 밝고 산의 윤곽들이 선연해지면 자작나무도 굴참나무도 그냥,

추운 산의 일부로 돌아가 원래의 자리에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는 것이었다.

그냥 겨울 산이 되어 침묵 속으로 잠겨드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