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성지순례 / 이공

주선화 2010. 4. 28. 13:22

성지순례/ 이공

 

 

세간의 바람이 제법 무르익었습니다

실수로 찬물 타버린 커피 같은 세월도

이제는 마실 만합니다.

방부처리 된 뉴스로 창문을 닦을 시간입니다.

유통 기한 지난 영화가 싱겁게 끝이 났으니까요.

빈 빨래 줄에 마음 몇 장 빨아 널어놓고

투털거리며 올라오던 아랫마을 내려다봅니다.

함부로 밟고 올라왔습니다.

성배에 입맞추려했던 십자군처럼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 다 적인 줄 알았습니다

물 위라도 걸을 수 있으리란 심장 때문에

허우적거렸던 날 많았습니다.

여기 와서야 고개 숙여지다니요

연속극 틀어놓은 저 골목에서

날마다 최후의 만찬 열린다는 걸 모르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열 두 광주리 수북이 남도록

나누어 먹고 있다는 걸 나만 모르고.....

바람도 내려가서 떡 한 덩이 얻어먹고 갑니다.

손때 차곡차곡 쌓여가는 저기가 유적지 같습니다.

 

 

* 1974년 경남 합천 출생

   2004년 열린시학 등단

   천겅문학상 금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