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바람의 냄새 / 윤의섭

주선화 2010. 6. 1. 10:25

바람의 냄새 / 윤의섭

 

 

이 바람의 냄새를 맡아 보라

어느 성소를 지나오며 품었던 곰팡내와

오랜 세월 거듭 부활하며 얻은 무덤 냄새를

달콤한 장미 향에서 누군가 마지막 숨에 머금었던 아직 따뜻한 미련까지

바람에게선 사라져간 냄새도 있다

막다른 골목을 돌아서다 미처 챙기지 못한 머리 내음

숲을 빠져나오다 문득 햇살에 잘려나간 벤치의  추억

연 붉은 노을 휩싸인 저녁

내 옅에 앉아 함께 먼 산을 바라보며 말없이 어깨를 안아 주던 바람이

망각의 강에 침몰해 있던 깨진 냄새 한 조각을 끄집어낸다

이게 무언지 알겠느냐는 듯이

바람을 안고 다니던 멸망한 도시의 축축한 정원과

꽃잎처럼 수없이 박혀 있는, 이제는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전혀 가 본 적 없는 마을에서 피어나는 밥짓는 냄새가

그런 알지도 못하는 기억들이 문득 문득 떠오를 때에도

도무지 이 바람이 전해준 한 조각 내음의 발원지를 알 수 없다

먼 혹성에 천년 전 피었던 풀꽃 향이거나

다 잊은 줄 알았던 누군가의 살내거나

길을 나서는 바람의 뒷자락에선 말라붙은 낙엽냄새가 흩날렸고

겨울이 시작되었다 이제 봄이 오기 전까지

저 바람은 빙벽 속에 자신만의 제국을 묻은 채 다시 죽을 것이다

 

 

*현대시학 5월호 권두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