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들장 / 최동호
구들장 / 최동호
인기척에 놀라 단풍잎 흩날리는 가을
망월사 앞마당
구들장을 뒤집어 불의 혀를 말리고 있었다
생솔가지 지피며 눈물 감추던 겨울
돌의 숨결에
침묵의 먹을 갈던 구들장 돌부처
홀연히 그가 밟고 간 먹구름 뒤의
천둥소리
환한 절 마당에 작파해버린 경전들
지옥의 유황불 치달린 가을 말발굽
망월사 앞마당
구들장을 뒤집어 바람의 머리칼을 다듬고 있었다
반가사유상
취기 오른 밤
인사동 지렁이 같은 골목길을 돌고 돌아
낡은 술집 문을 열다가
문득 발견한 청동 반가사유상
들킬까 숨죽이고 바라보던
첫사랑 여인처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 햇살에 지난 밤 어수선한
이야기들 다 지우고
청동 반가사유상을 감싼 흰 플라스틱
포장지 풀어 거실 한쪽에 자리 잡게 하였더니
이사 온 새집의 허공을
부유하던 먼지들이 비스듬히 사유하며 가라앉는다
젊은 석가모니는 이천 오백년 전 단식과
설산의 고행 끝에
인간의 苦에 대한 사유를
꿰뚫어 마쳤다는데, 21세기 어느 무명의
조각가가 빚어낸 청동 반가사유상 앞에서
부유하던 마음이 평정을 얻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라크전의 불기둥이
경축일 불꽃놀이처럼 터지는 TV 옆에서
반가사유상은 지금 우리에게
무얼 말하고 있는 것일까,
바그다드 도심지가 청동의 대포에 무너지자
도적 떼들이 약탈을 자행하고
중생들은 축생처럼 도처에 널부러져
살생의 포연이 자욱한 자리에
한 송이 연꽃을 던지는 청동 반가사유상
조용한 미소 말이 없어도
연꽃 물살 이랑을 넓혀가지만
아직도 나는
술냄새 풍기는 입으로
누항의 거리에서
사유하는 무명의 인간을 찾고 있다
아름다운 손
베란다 앞 넓은 공터가 보기 좋아 셋집을 정하고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책
백여 상자를
고층으로 끌어 올려 늦여름 이사를 하고 보니
바로 베란다 밑 한구석에
미처 못 본 폐품 처리장이 있었다
버려야 항 것도 다
추려내지 못한 채
폐품 처리장에서 포자처럼 날아드는
지난 기억들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담배를 피워 물고 자세히 보니
멀리 인수봉과 백운대가 병풍처럼 둘러 서 있는데
아파트 벽돌담과 폐품 처리장 사이에
조그만 채마밭이 있었다 해질녘 누군가 채마밭에 나와
흙을 고르고 물을 뿌리고 있었다
폐품 처리장의 한 노동자가
찬거리라도 마련할 양으로
가을 배추씨를 심고 있었을까
이사 첫날 밤 뒤척이는 마음을
벽돌담 사이 채마밭 일구는
노동자의 손이 다독여 주었다
낯선 자리에서 몸을 뒤틀던 책들도 그제서야
자리를 잡는 것이었다
처음 본 넓은 공터가 아니라
벽돌담 사잇길 조그만 채마밭이
파지처럼 구겨진 마음
흙속에 갈무리해 주는 것이었다
* 불꽃 비단벌레 시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