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은현리 홀아비비람꽃/ 정일근

주선화 2010. 11. 4. 11:47

은현리 홀아비바람꽃 / 정일근

 

 

산다는 것은 버리는 일이다

 

 내 심장 꺼내고 그 자리에 채워 넣었던

 첫사랑 했으나, 그해 가을

 진해 바다로 투신하고 싶었던

 여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었던 심장의 통증까지

 추억에서 꺼내 내버린 지 오래다

 

 詩에 목숨 걸었으나, 당선을 알려주던 노란 전보

 첫 청탁서, 첫 지면, 첫 팬레터… 詩로 하여 내 전부를 뛰게 했던

 무엇 하나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다

 

 가슴 설레며 읽은 신간 서적 책장에 꽂아둔 채

 표지가 낡기도 전에 잊히듯이

 산다는 것은 또 그렇게 잊어버리는 일이다

 

 만남보다 이별이 익숙한 나이가 되면

 전화번호 잊어버리고 주소 잊어버리고

 사람 잊어버리고, 나를 슬프게 하는 것 모두

 주머니 뒤집어 탈탈 털어 잊어버린다

 

 행여 당신이 남긴 사랑의 나머지를

 내가 애틋하게 기억해주길 바란다면

 그건 당신의 검산이 틀렸다

 

 솥발산 깊은 산길에 홀아비바람꽃 피었다

 잎 버리고 꽃잎 버리고 홀아비바람꽃 피었다

 

 나도 홀로 피어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내 인생이다

 내가 나를 인정하고부터 편안하다

 편안해서 혼자 우는 날이 많아 좋다

 

 다시 바람 불지 않아도 좋다

 혼자 왔으니 혼자 돌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