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 있는 시
마음 / 김혜순
주선화
2010. 12. 10. 15:38
마음 / 김혜순
분홍색 얇은 꽃 이파리 결 따라 팔랑거리는 물
암술 수술의 간절함으로 가녀린 물
비린 거울처럼 내가 비춰지는 몸 속의 물
비추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물
바람에 섞여 흩어지다가 머리칼을 적시는 물
방바닥까지 내려온 구름처럼 나를 잠기게 하는 물
흐릿한 먹물로 찍어 쓴 초서처럼 내 몸 위에 씌어지는 물
그 물결로 나를 살랑살랑 흔드는 물
햇볕에 마르는 희디흰 광목에
보고 싶은 얼굴의 형상으로 번지다 마는 물
알약과 함께 삼켜지는 물
저녁나절 창문을 어루만지다 돌아가는 물
어항에 담겨 물고기의 숨이 되는 물
방 한가운데서 거룩하게 끓어오르는 물
향기로운 찻잎을 적시는 물
서로 마주 앉아 예를 다해 정중하게 마시는 물
이어서 내장을 닦고 방광에 모이는 물
더러운 물
썩어서 끓어오르는 물
네 살갗의 작은 구멍마다 송송 맺히는 물
짠물
물이 물을 때렸어. 뱀처럼 엉킨 물. 발가벗은 물. 물이 물을 박살냈어. 철썩철썩 때리는 물의 손가락. 기어가는 물. 뒹구는 물. 쇠처럼 굳은 물. 참지 못하고 마침내 쏟아지는 물. 뺨 위에 씌어지다 귓바퀴 뒤로 흘러내리는 물. 물과 물이 마주 앉아 서로를 비추다 가버렸어. 물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나날의 그림자. 축축한 이 거울이 죽으면 나도 죽게 되는 물.
(입속에서 하루 종일 물이 끓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