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파로호 / 김영남
가을 파로호 / 김영남
저 호수, 호주머니가 없다
불편하다
뭔가 넣어두었으면 좋겠는데
너덜너덜한 생각 거두고 싶은데
심플 젠틀 모던 이런 단어들이 지나간다
내가, 호주머니 되어보기로 한다
호수의 거추장스런 손들을
모두 한번 거두어주기로 한다
갑자기 호수가 사라진다
거기에 맡겨본다
윤동주 시구 하나
노자의 역성(易性)
장자의 제물론(齊物論)
누가 내게 쪽배를 띄운다
특히 이번 시집에서는 한 행이 한 연을 이루는 시구가 많은데, 그러면서도 비유의 비약성, 여백 사이의 간극, 은유와 환유의 혼용 등으로 인해 시적 밀도가 대단히 높다. 또한 비유의 비약과 문맥 사이의 여백이 가지는 간극은 시의 비밀을 행간에 깊숙이 숨겨 읽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위 시의 경우에도 가을철 춘천의 파로호를 방문한 화자가 호수를 바라보며 “호수”에서 “호주머니”로 비유의 통념을 이탈하는 비약을 시도한다. 그러다가 3연에 이르러 ‘나(주체)’는 호주머니로 변신하면서 좀더 주관성이 강한 비유로 확장된다. 이처럼 김영남은 자신의 핵심 기법인 메타포를 관점과 강도의 차별성을 가지고 이질적인 방식으로 구사하는데, 그 전체적인 구도는 ‘대상에 대한 메타포’에서 ‘주체에 대한 메타포’로 전개되면서 주관적 비유의 강도를 점층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즉, ‘서정’을 토대로 ‘지적 변용’의 강도를 강화해나가며 주체가 능동적으로 대상에 투사하거나 대상을 수용하는 시상 전개를 보여주는 것이다
남해 유자 주무르면
향기로운 시간 속으로
누가 올 것만 같다
벌써 오고 있다
아름다운 사람이 와
담벼락을 돌아갔다
그러자 그 자리
환한 전등이 내어 걸린다
깔깔깔 웃음소리 굴러 나오고
웃음에 얻어맞은 난
파란 멍이 만져진다
내 멍도 그 사람 따라
담벼락 위로 올라갔으면 좋겠다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가
불빛에 익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누가 그걸 또 주무르고 있나
소곤거리는 소리, 흥얼흥얼하는 소리
누구세요?
들어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