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담배향이 짓묻은 꽃 핀 베개잇 / 박송이

주선화 2011. 9. 23. 09:47

담배향이 짓묻은 꽃 핀 베개잇 / 박송이

 

 

 

우리가 한때 사랑했던 페이지를 펼치면 거기엔 갖가지 기생의 흔적이 새

겨져 있다  꽃일까 곰팡일까 천장에 피어난 핏빛 자국, 눈을 뜨면 넋이 가려

워 넋이 미쳐서 방이 통째로 젖어가는 장마의 계절이 온다

 

  소주를 한잔 붓고 두잔 째 퍼붓고 붓고

  사람을 사랑하는 게 죄냐고

  놀이터에 퍼질러 내 집 앞을 꺼이꺼이 너는 울었니

 

  난 네게 커다란 상징도 무엇도 아닌데

  지랄 맞은 세상에서

  서러운 몰골로

  더러운 근성으로 살아야 한다고

  손때가 과오처럼 구부러진 너의

  검고 긴 속눈썹이 빗속에 죄 없이 떨고 있다

 

  나는 말 없이 창문을 세게 잠그고

  아무도 없는 딱딱한 침대에 누워

  온밤이 죽은 척

  꾸깃꾸깃 펼쳐 읽고 접은

  낡고 얼룩진 귀퉁이의 잠을 오래 잔다

 

  미안해요 야릇한 시체인 채 당신을 우롱했어요

 

  찬 벽돌 같은 베갯잇에선

  네가 피우던 말보루 레드향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