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거룩 / 성동혁
주선화
2015. 1. 2. 11:10
거룩 / 성동혁
욕조에 앉아 깃털을 뽑고 있다
꽃을 쪼던 새를 도저히 가만둘 수 없다
채워지는 욕조 안에
검게 뒤엉킨 화원에
불을 놓을 것이다
갸륵해질 수 없다
아비여 용서치 마소서
예언대로라면
난 죽을 수 없어
용맹해지는 것이다
나무 위 부리를 다듬고 있는
이 검은 짐승의 무수한 혈육을
맨몸으로 기다리고 있다
꽃은 아비의 눈알이었다
발만 남은 아비를 안는다
까마귀들이 달을 가린다
풍향계
나는 천박해지고 있다 다리를 올리고 천천히 사랑에 빠
지고 있다
장마는 철창을 뜯고 거실까지 들어온 손님이다
죽음은 철창을 뜯고 침실까지 들어온 손님이다
풍향계는 누구의 손으로 이리 세차게 흔들릴까
누가 구름에 바셀린을 발라 놓았을까 손을 놓아도 돌
아가는
한 방향으로 한 방향으로 도는 연못은 누가 파 놓은 걸까
나는 덕분에 천박해지고 있다 다리를 올리고 천천히 사
랑에 빠지고 있다
배 위에서 애인은 죽음과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나를 파란 수국이라 불렀다 내가 만든 푸른 멍들
을 해변의 묘지*라 불렀다
옷을 벗고 하는 이야기는 자주 바뀐다며 산책을 하자고
도 했다
*P.VALERY, LeCimetiere Mar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