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무쇠칼 / 배한봉
주선화
2015. 10. 30. 09:45
무쇠칼 / 배한봉
그때 나는, 숫돌을 하나 장만했지.
허공을 베려고
쓱쓱 무쇠칼 하나 갈았지.
단칼에 베겠노라,
기세등등 시퍼렇게 칼날을 세웠지.
칼바람도 베지 못하고 지나가던
의심이라는 허공,
슬픔이라는 허공,
고통이라는 허공,
분노라는 허공,
절망이라는 허공,
물 같은 허공,
칼로 베면
칼이 지나가는 소리만 남겨놓는 허공,
칼을 깊숙이 받아들였다가 상처도 없이
금방 봉합해버리는 허공,
그때 나는 보았지.
우주의 혀 같은
하얀 목련 꽃잎 한 장,
허공의 없는 뼈와 살 사이
천수천안의 보이지 않는 손길로 지나는 것을.
흔적 없이,
자기 몸에서 떨어져 나온 줄도 모른 채
허공을 읽는 꽃잎의 흰 행간.
허공은 베는 것이 아니더군.
허공은 읽는 것이더군.
한 몸이 되는 것이더군.
새파란 허공에 깊숙이 들어간 마음이
천수천안의 거룩한 적막을 보는 일이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