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묵화 / 김이흔

주선화 2017. 9. 4. 09:55

묵화

                                   김이흔



검은 먹을 치는 묵화를 볼 때마다


사는 일이 흰 것과 검은 것 너머에 있는 듯하여


나는 자주 닥나무 꽃 피는 쌍계사 팔상전을 서성이다 오곤 한다


한 나무 위에 올라앉은 몇 새들처럼


승속이 하나로 머물러 있는 묵화 속에는


내 생의 어느 때 만난 당신과의 인연이 있고


이 생과 저 생이 다를 것 없이


지금 붓끝 안에서 이어지고 있는


눅어진 호흡이 있음을 안다


지극히 제 죽음 속을 들여다 본 자들은


먼 곳을 다녀온 자들은


저 검은 먹색으로 피었다 지는 억겁의 생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신발 속에 두고


홀연히 몸을 일으켜 떠나버릴 수도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