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흙이 되는 순간 / 김관용
주선화
2019. 6. 10. 11:14
흙이 되는 순간
김관용
심해는 따뜻한 돌을 쥐고 들어가는 작은 방, 이라고 쓰고 보니
생각의 어종(魚種)이 깊이 내려간 날이 오래다 빛이 들지 않는 그
곳은 벌써 잠이 든 걸까 흔들어 깨어나면 잔디를 심을 것이다 처
음 사랑을 하려 했을 때, 비린내 나는 가는 선(線) 위를 마구 달리
다가 다시 그 선에 매달리다가 결국엔 거기에 목을 매고야 마는
파도 같은 이야기는 왜 쉽게 구겨지는가 인간의 언어를 배운 이
후 너에 대한 감정은 찬 유리에 입김으로 대신한다 수천 킬로미
터의 해구(海溝)에 빠져 수압을 견디려면 분명 조금 더 크고 투명
한 이빨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서로 미쳐가던 그곳엔 내가 없으
므로 흙이 되는 순간이다 목욕탕에선 비어 있는 로커를 오래 본
다 두고 올 것이 있는 것처럼 모서리가 흐물거리고 잘 닫히지 않
다 심해다 열리지 않는 건 닫히지도 않아, 라고 비어 있음의 형식
에 관해 말한다 인상을 쓰는 버릇은 언제부터 생긴 건지 손가락
열 개를 펴 얼굴을 묻었다 흙이 되는 순간이다 요즘은 너무 추워
지면 필기체를 쓰지 않지만 우리는 꿰맨 자국처럼 아물었다 허
옇게 들끓던 비애(悲哀)의 소리는 잠시 지나는 부력이었다며 나
를 벗어둔 셔츠의 냄새가 어둡다 어둠은 단단한 돌이 된 것 같다
단추 풀어 겉옷 하나 띄워 보내듯 그림자를 놓아둔다 이곳은 아직
내가 없으므로 풍요로운, 그래서 훍이 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