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눈물만큼의 이별 / 한현수

주선화 2020. 11. 17. 09:20

눈물만큼의 이름

ㅡ 한현수

 

 

꽃 이름 하나가 기억에서 없어진다

기다려도 꽃 이름을 불러 낼 수 없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누군가의 문밖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낼 수 없는 경우를 생각한다

 

주소록 뒤지듯 식물도감을 펼쳐보지 않기로 한다

좀 더 기다리기로 한다 문밖에서, 그 이름이 걸어 나올 때까지

꽃은 그렇게 얻는 이름이어야 하니까

 

눈을 감는다, 나무처럼 기다리는 자리에서

나는 그 이름과 똑같은 꽃을 피우는 상상을 한다

오지 않는 이름을 기다리며

 

땅바닥에 꽂혀있는 꽃을 밟으며 걷는다

꽃은 꽃을 상상하도록 두두둑

두두둑,

 

발끝에서 부서지는 이름 하나

혀끝에 맺힌다, 눈물만큼의 이름

 

거꾸로 매달렸다가 하얗게 직선으로 추락하며

망각에 저항하는 이름

 

꽃이 해마* 속으로 떨어진다

나비 한 마리 끌어안고 있다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공간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

ㅡ 슬픈 모유*

 

 

엄마는 나를 뱃속에 두고 능욕을 당했어

놈들이 아빠의 남근을 잘라 엄마 입에 밀어 넣었대

엄마는 날 위해 싹싹싹 빌었다지

난 엄마 젖에 녹아있는 두려움을 먹고 자랐어

성폭행을 당하지 않으려 질 속에 감자를 넣어두었지

그런데 자궁이 감자를 거부하나 봐

배가 아파

머리가 아파

난 코피를 쏟으며 자꾸만 쓰러져

감자에 싹이 나려나 봐

싹이 나서 잎이 나서

혼자서 걷지도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못해

그건 슬픈 모유 때문

리마의 거리에선 날마다 가난한 이들의 혼례가 있어

그러나 축하의 춤을 출 수가 없어

멀리서 바라만 봐도 온몸이 떨려

아직 엄마의 장례를 치르지 못했어 난 돈이 필요해

노래 값 던져주는 주인을 위해 잉카의 노래를 부르고 있어

사막의 길 잃은 영혼을 초대하듯

엄마를 키운 사막에 엄마를 묻고 싶어라

별이 쏟아져 내린 아침이면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

감자꽃이 모유 같은 이슬을 물고 있는 곳

하지만 당신의 정원에는 감자꽃이 보이지 않아

감자가 꽃피우기 어렵다는 당신, 나와 가위바위보 할까?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 싹싹싹

덩쿨째 몸을 파고들어 올지 몰라

싹싹싹

영원히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아

싹싹싹

어서 꺼내줘 내 몸에서 감자를 꺼내줘

감자꽃이 피려나 봐

 

 

*클라우디아 로사 감독의 페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