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상

2021년 시산맥 신인상 당선작

주선화 2021. 3. 18. 11:34

아가씨, 활짝 핀 꽃

 

ㅡ 김이응

 

 

엄마는 빨간약을 아까징끼라고 말했다

 

초경을 하지 않은 계집애들과 몽정 없는 사내 애들이

숨바꼭질하던 무싯날,

 

하날 때, 두알 때, 사마중 날 때,

껌 씹는 언니들이 육낭거지 팔 때,

술래의 딸꾹질이 때맞춰 날 때,

 

고드래뽕이라며 한 마장쯤 내달리다

도깨비고비에서 넉장거리로 무너지던 저물녘

아카시아 단내가 이마를 스쳐올 때,

 

물음표를 떼어내며 첫사랑에 눈뜨던 초여름은

웅덩이마다 도롱뇽이 슬어놓은 알알이 몽글몽글해

무덤 많은 논틀밭틀로 질러가던 내 발소리에 놀라

오줌 지리고 돌아온 밤

 

담 없는 그 집에선 숨길 수 없는 게 너무나 많아

잉큼잉큼 뛰는 아랫배도 숨길 수 없어

너른 변두리로 쏘다닐 즈음

 

더 이상 감출 수 없어

아까징끼로 가슴팍을 문대던 엄마

 

아가씨야 가시에 찔렸다며 말 더듬던 내 동생

딸국질이 뚝 멈췄을 때,

 

질겅질겅 씹던 껌을 삼켜버린 무싯날은

내 몸에서도 아가씨 꽃 지린내 나던 날이었다

 

 

 

랑게르한스섬의 일요일 오후

 

 

인상파 말기입니다

 

이자라고도 불리는

X번째 투시 그림입니다

 

마이크로네시아의 산호초 같기도 하고

썩은 과일의 씨앗 같기도 한

폴립들이

무성생식으로 번식하는

여기

이 섬이 랑게르한스죠

 

달력에서 달아난 어느 일요일 오후

 

그림자에

쫓기던 화가는

내분비선에 실린

옛 애인의 검은 양산에 놀라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팔라지고

흥건해진 손바닥으로 피하지방층을 가리려 했다지만

 

자율신경계의 교란이란

단맛에 길들여진 원숭이의 눈썰미엔

어쨌거나 달달한 포도당의 장난인데

 

창녀의 웨딩드레스처럼 부푼

유령해파리

 

촉수처럼 뽀족한

바늘로

찔러댄

셀 수 없는 우점종들

 

보호색으로 가릴수록

빛에 빛을 더할수록

도드라지는 그늘에서

 

화가의 엉덩이가

바나나처럼 짓무르고 있습니다

 

피사체의 해부학 시간,

 

마취된 카메라

동공이 풀어지고 있습니다

 

십이지장에서 비장까지

리아스해안선이 뒤집히고 있습니다

 

복제하셨습니까?

그럼, 캔버스에 사인해주시지요

 

 

 

사라진 옥상 언니들은 몇 옥타브까지 올라갔을까

 

 

언니들은 섬, 구름, 섬, 구름을 부르며 구름을 더 좋아했다

나는 발, 구름, 발, 구름을 굴리는 언니들을 더 좋아했다

 

어느 구름에서 비가 내릴지 모르는 날에도 언니들은 웃는다

바다 끝까지 간 사내는 돌아올 힘을 남겨두지 않았다고 믿으며

섬, 구름, 섬, 구름처럼 들뜬 그녀들은 구름을 더 좋아했다

 

구름다리를 건너다닌 옛날을 떠올리며 빨래를 밟으며

나도 옛날에 어린애였단 건 믿을 수 없지만 믿음직한 언니들은 껌을 씹는다

어느 호주머니에서 한숨이 빠져나올지 모르는 아주머니처럼

풍선껌을 부풀리다 손톱으로 터뜨린다

 

해바라기보다 키 큰 바지랑대 사이로 몰려다니는 먼지들

그 사이로 마르는 빨래들, 언니들은 마르지 않고

네 시가 되면 어째서 이 빠진 접시 같은 기분에 젖는지

접시꽃과 헷갈리는 꽃 이름이 떠오르지 않을수록

그녀들은 구름을 더 좋아했다

 

빨래가 젖는다 비옷이 없는데도 언니들은 더 이상 젖지를 않고

비 맞은 비웃음은 쓰지만 쓴웃음을 소리가 없는데

실소로 번지면 황혼이 올까? 황혼은 종기보다 더 잘 터질까?

그녀들이 웃는다 요실금 터진 할머니처럼 찔끔찔끔 웃는다

 

어느 그림자가 먼저 추락할지 모르는 초저녁

헤프게 웃던 언니들은 나팔꽃처럼 축 처진 외줄을 타고,

 

구름, 빵, 구름, 빵, 노래하다 사라진 그녀들은 언제나 빵이 더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