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포비아 / 여태천
주선화
2021. 5. 6. 13:59
포비아
ㅡ 목줄
ㅡ 여태천
희망의 줄은 어디에나 있다.
복권을 보려는 사람들, 그래도
줄을 서는 일은 즐겁지 않다고 너는 생각한다.
줄 잘 서서 출세했다는 이야기나
줄 하나에 목숨을 건다는 말, 깃발을 좇아가듯
줄을 따라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사람들은 요즘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줄을 선다는 일이 억울할 때도 있겠지만
줄을 서서 검사를 하고
줄을 서서 약을 탄다.
줄을 서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뒤로
줄을 서보지도 못한 노인은 피켓을 들고 외치다
줄에 묶여 질질 끌려 나간다.
마음잡고 꽃을 키우겠다던 청년은
줄줄 새는 비닐하우스 인생을 갈아엎었고
줄이 끊긴 아이들은 학교에 안 간 지 오래, 그래도
줄을 지어 때가 되면 날아가는 새들은 없는
줄을 만들면서 잘도 날아가고, 그래도
줄 서서 기다리지 않기로
멀리 있어 보이지 않는 줄 알았지만 이젠
줄이 없다고 너는 생각한다.
중세의 기사들처럼 초원을 횡단하는 누 떼
그 끝에 휴식이 있을 리 없다고
개 목줄을 매만지며 너는 생각한다.
까마귀 떼가 해변에 줄지어 내려앉고
줄지어 선 가로등이 차례로 꺼지면
세상의 끝에 도착했다고 너는 생각한다.
졸음은 허기마저 앗아가고
넥타이를 풀면 희망도 사라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