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예언자 / 홍일표
주선화
2021. 9. 6. 13:35
예언자
ㅡ 홍일표
머잖아 첫눈이 내릴 거라고 한다
맹수가 들끓는 태양 제국의 칙령과 법제를 버리고
하늘 밖을 오래 떠돌던 눈송이가 망명한다고 한다
조각조각 깨진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척
최대한 우아하게 밀입국한다고 한다
단풍나무 밑둥에 쌓이는 실패한 나뭇잎
잘게 부서져 오갈 데 없는 유리조각처럼
머잖아 첫눈이 내릴거라고 한다
어두워지는 지평선 밖을 천천히 읽으면서
잘린 팔이 퍼덕거리는 공장 바닥에 함박눈이 내릴거라고 한다
부서진 것들은 서로 이름도 신분도 모르지만
어느 한 모퉁이에서 튕겨 나온 것들
높은 담벼락을, 우선 선 동상을, 황금빛 첨탑을
조금씩 덮을 거라고 말한다
조금씩 무너뜨릴 거라고 말한다
산에서 설해목 꺾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공장 뒷산에 잘린 팔의 따뜻한 무덤이 생길 거라고 한다
예언도 미래도
찌그러진 캔처럼 웃고 있지만
언제나 그렇듯
믿지 않지만
머잖아 첫눈이 내릴 거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