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재봉틀과 오븐 / 박연준

주선화 2021. 11. 24. 15:13

재봉틀과 오븐

 

ㅡ박연준

 

 

늙는다는 건

시간의 구겨진 옷을 입는 일

 

모퉁이에서 빵 냄새가 피어오르는데

빵을 살 수 있는 시간이 사라진다

 

미소를 구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높은 곳에 올라 가면

기억이 사라진다

신발을 벗고 아래로 내려오면

등을 둥글게 말고

죽은 시간 속으로 처박히는 얼굴

 

할머니가 죽은 게 사월이었나,

사월

그리고 사~월

 

물어볼 사람이 없다

당신과 나를 아는 사람은 모두 죽거나

죽은 것보다 멀리 있다

 

사랑을 위해선 힘이 필요해,

라고 말한 사람은 여기에 없다

만우절에 죽었다 그의 등,

얼굴,

미소를

구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사랑과 늙음과 슬픔

셋 중 무엇이 힘이 셀까

저울을 들고 오는데

 

힘은 무게가 아니다

힘은 들어볼 수 없다

 

재봉틀 앞에 앉아 있고 싶다

무엇도 꿰매지 않으면서도

 

누가 빵을 사러 가자고 노크하면

구겨진 옷을 내밀고

문을 닫겠다

 

당신은 내 앞에 내려앉은 한 벌의 옷

 

사랑한 건 농담이었어

당신이 변명하면

 

깨진 이마 같은 걸 그려볼 것이다

 

웃을게요 나는

웃음을 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