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잉태거나 혹은 불임이더라도 / 김밝은
주선화
2022. 3. 12. 10:08
잉태거나 혹은 불임이더라도
ㅡ김밝은
독한 마음으로 마련했어요
함부로 찾아올 수 없는 곳
다만, 오늘은 뽀족하고 텅 빈 세계죠
사방은 희고 고요해서
까만 점 하나만 찍어도 문장이 될 것 같은데
두 손을 자판 위에 나란히 올려놓으면
가난한 뼈가 자꾸 제자리를 벗어나려고 해요
날뛰는 몸짓이 반복될 때는 열심히 숨고르기를 해도
글자 하나 도무지 만져볼 수 없지만
슬픔이란 감정이 온몸을 휘감다 잠시 눈 감는,
바로 그때
한 줌의 싱싱한 표정이 만들어질 거라고
나를 들여다보던 입술 하나가 지그시 알려주었지요
피부가 원하는 물광이 내 문장에도 절실하다는 걸
바깥의 다른 이름들은 눈치 채지 못해야할 텐데,
언제나 내가 먼저 고백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곤 해요
무슨 궁리를 써서라도 짜릿한 생명 하나쯤 만들어야죠
더 춥고 더 외로운 내일일수록 무한 상상으로 뻗어 나가리라 믿으며
아직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은 이야기들의 숙주가
시간을 잊고 서붓거리는 중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