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가난에 대하여 / 김승희

주선화 2022. 3. 22. 11:05

가난에 대하여

 

ㅡ김승희

 

 

가난은 전깃줄 위에 나란히 앉아 있는

반쯤 감전된 검은 까마귀들이거나

신문지로 덮어놓은 밥상

구타와 악다구니와 꽃밭 앞에 나동그라지는 세숫대야

천지는 인자하지 않단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 하나

병들어서 어느 날 밤에 누군가는 생을 떠나고

아침 골목에 내놓은

연탄재 구멍 속에 누군가 파란 손목 두 개를 꽂아 놓았네

 

가난은 폭삭 끊어진 계단

계단이 없으면 천사도 안 오고 약장사도 안 오고

돈도 안 오고

밤새 눈 내려 얼어붙은 빙판길에 압정같이 떨어진 별빛들

가난은 압정 같은 별빛을 밟고 걸었다

 

슬픔은 휘발되지 않더라

슬픔은 가라앉아 벽돌이 되기도 하더라

그 벽돌이 몸을 이기기도 하더라

벽돌 한 장만한 마당에 꼬부랑 할머니가

세 살짜리 손녀와 앉아 채송화나 분꽃 씨앗을 심는 것

아욱을 바락바락 씻고 맑은 쌀뜨물에 된장을 살짝 풀듯이

어진 손이 그렇게 하는 것

천지는 인자하지 않지만

가난 속에서 어진 기운이 나오는 움틀임의 방향으로

그렇구나,

가난이 마지막 단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