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꽃(외4편) / 문태준

주선화 2022. 4. 18. 09:38

 

ㅡ문태준

 

 

당신은 꽃봉오리 속으로 들어가세요

조심스레 내려가

가만히 앉으세요

그리고

숨을 쉬세요

부드러운 둘레와

밝은 둘레와

입체적 기쁨 속에서

 

 

첫 기억

 

 

누나의 작은 등에 업혀

빈 마당을 돌고 돌고 있었지

 

나는 세살이나 되었을까

 

볕 바른 흰 마당과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깰 때 들었던

버들잎 같은 입에서 흘러나오던

누나의 낮은 노래

 

아마 서너살 무렵이었을 거야

 

지나는 곁에

내가 나를

처음으로 언뜻 본 때는

 

 

 

음색(音色)

 

 

시월에는

물드는 잎사귀마다 음색이 있어요

 

봄과 여름의 물새는 어디로 갔을까요

빛의 이글루인 보름달은 어디로 갔을까요

뒤섞여 있던 초록들은 누구의 헛간으로 갔을까요

 

나는 갈대의 흰 얼굴 속에 있었어요

마른 잎에서는 나의 눈을 보았어요

 

얇고 고요한 물, 꺾인 꽃대, 물에 잠기는 석양

그리고 그 곁엔

간병인인 시월

 

 

아버지의 잠

 

 

아버지는 잠이 많아지네

시든 풀 같은 잠을 덮네

아버지는 일만가지의 일을 했지

그래서 많고 많아라, 아버지를 잠들게 하는 것은

누운 아버지는 늙은 오이 같네

아버지는 연고를 바르고 또 잠이 들었네

늙은 아버지는 목침 하나를 덩그러니 놓아두고

잠 속으로 아주 갈지도 몰라

아버지는 세상을 위해 일만가지의 일을 했지

그럼, 그렇고말고!

아버지는 느티나무 그늘이 늙을 때까지 잠잘 만하지

 

 

아침은 말한다

 

 

아침은 매일매일 생각한다

난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은 어선은 없는지를

조각달이 물러가기를 충분히 기다렸는지를

시간의 기관사 일을 잠시 내려놓고 아침은 생각한다

밤새 뒤척이며 잠 못 이룬 사람의 깊은 골짜기를

삽을 메고 농로로 나서는사람의 어둑어둑한 새벽길을

함지를 머리에 이고 시장으로 가는 행상의 어머니를

그리고 아침은 모스크 같은 햇살을 펼치며 말한다

어림도 없지요, 일으켜줘요!

밤의 적막과 그 이야기를 다 듣지 못한 것은 아닐까를 묻고

밤의 위한 기도를 너무 짧게 끝낸 것은 아닐까를 반성하지만

아침은 매일매일 말한다

세상에, 놀라워라!

광부처럼 밤의 갱도로부터 걸어나오는 아침은 다시 말한다

마음을 돌려요, 개관(開館)을 축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