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막지 말아요(외 2편) / 정채원
나를 막지 말아요(외 2편)
ㅡ정채원
가슴에 구멍을 뚫으면 피리가 되지
몇 개를 막으면 노래가 되지
노래에 구멍을 뚫으면 춤이 되지
자면서도 멈출 수 없는 춤
떼 지어 다녀도 늘 혼자인 춤
구멍이 다 막히는 날
노래도 춤도 다 막히고,
막이 내리지
다음 공연은 아직 미정
비로소 꽃
꽃은 뒤에서 봐도 꽃이고 거울 속으로 몰래 훔쳐봐도 꽃이고 비대면으로 봐도 꽃이다. 밥을 먹다 봐도 꽃이고 말다툼을 하다 봐도 꽃이고 걸레질을 하다 봐도 꽃이다.
내려다 봐도 지고 있고 올려다 봐도 지고 있다. 코미디 쇼를 틀어놓고도 지고 있고 수염을 깎으면서도 지고 있고 자다 깨어 새벽까지 뒤척이면서도 지고 있다. 꽃을 버리면서 꽃은 꽃이 되고 있다.
우리집 신발장 옅에 놓인 꽃은 일 년 전에도 피어 있었고 어제도 피어 있었고 오늘도 피어 있다. 언제나 활짝 피어 있는 꽃은 꽃이 아니다. 질 줄도 모르는 건 꽃이 아니다.
나는 피었다가 기필코 지는 꽃을 사랑한다. 지는 모습을 감추지 못해 슬퍼하는 꽃을 오래 사랑한다. 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꽃을 더 오래 사랑하다. 피기도 전에 져버린 꽃을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패색이 완연한 계절, 내 안에 너는 아직도 피어 있다. 비로소 꽃이 되었다, 서로에게.
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쉬지 않고 내리는 빗물이 사막에 수백 개의 호수를 만든다. 우기가 끝나면 가장 깊어지는 수심을 들여다본다. 떨어져 있는 호수와 하얗게 타는 모래 밑에서 서로의 냄새를 더듬는다. 바다에서도 본 적 없는 주황물고기가 헤엄쳐 다니는 사막 호수, 석 달이 지나면 사랑은 말라 버리고 모래에 처박힌 바퀴는 점점 더 꼼짝달싹 못할 것이고.
모래바람 속으로 눈썹에 내려앉는 모래를 깜빡이며 걷고 또 걷는다. 건기 뒤에는 우기를, 우기 뒤에는 건기를 마련한 건 누굴까?
그러나 건기를 지나도 또 건기, 우기를 지나도 또 우기, 그런 마을도 있다. 모두가 메말라 기억의 핏줄까지 마른 잎맥처럼 부서져 허공으로 흩어지던 마을, 혹은 젖고 젖고 푹 젖어 푸른곰팡이가 수국 꽃송이가 되다 쉰 밥덩이가 되다 수심 알 수 없는 웅덩이가 되던 마을, 모두가 제 안에서 익사해 퉁퉁 불어 터지던 마을, 살아도 살아도 살아본 적 없는 사람들이 죽어도 죽어도 죽어 본 적 없는 얼굴로 분노의 고무줄을 계속 잡아 당기던 마을, 의심의 풍선처럼 계속 불어 결국 터져 버리던 마을, 욕망을 계속 가열해 사랑하던 이들을 다 태우고 깨진 유리창과 검은 재만 남기던 마을,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도망치듯 떠나온 그곳.
우기가 끝날 즈음, 도망쳐 온 사람들의 사막에 피어나는 석 달 동안의 오아시스. 짧은 천국은 서서히 말라가고 갈라터진 바닥을 보이겠지만, 얼핏 본 주황물고기는 사람들 머릿속에서 계속 헤엄쳐 다니겠지, 다음 우기를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