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오목한 중턱 / 이정원

주선화 2022. 7. 21. 10:22

오목한 중턱

 

-이정원

 

 

신발 속에선 자꾸 시간의 발톱이 자라네

 

산모롱이 돌아 나폴나폴 나비 여섯 오목한 궁지(窮地)에 내려앉고

철없는 나비들 그녀의 진액을 다 핥아먹고

 

슬픔은 늘 오목한 곳에 모이지

손목과 다리오금, 복사뼈 부근, 가슴 안골

오목한 곳에 고인 슬픔은 썩지도 않아

 

부풀고 부화하고 증식하고 저희끼리 둥기둥기

밤이면 때로 기어 나와 얼씨구, 춤판을 벌였네 그녀는

 

춤에 지친 그들을 알약에게 주었지

알약 한 알에 손목, 알약 한 알에 무릎을

알약 한 알에 통등, 알약 한 알에 불면을

 

긴 발톱이 칡넝쿨처럼 엉겨 진보라로 말을 걸고 말을 거두는 칡꽃의 시간

 

시간의 발톱을 깎아야 하는데

관절이 점점 오목해져 그녀의 중턱이 움푹 꺼지네

 

슬픔의과부하 슬픔의반란 슬픔의자기복제

 

그녀가 중턱에 고여 있네 중력의 자장 안에 갇혀

이내 내리막길을 타려고 하네

 

턱밑까지 비탈진 그늘

방울져 있던 슬픔의 떼거리들이

떼구르르르 한꺼번에 쏟아져 비탈을 구르네

 

깎을 새 없이 발톱은 빠지거나 문드러지거나 

 

슬픔의자가당착 슬픔의뼈대 슬픔의행로 슬픔의간절한뿌리

 

나비들은 더 이상 오목한 곳에 깃들 수 없어

그녀의 중턱을 오래 서성이네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슬픔의 둥지를 겨우 엿보네,

이제야

이제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