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모음의 이중생활 / 김혜순

주선화 2022. 8. 27. 09:51

모음의 이중생활

 

-김혜순

 

 

엄마가 유리 믹서에 흰 침대들

가득한 호스피스를 넣고 곱게 간다

아니면 거대한 유리 믹서가 엄마를 갈고 있나?

호스피스엔 햇빛에 떠오른 먼지처럼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비밀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엄마는 유리 믹서에 하늘을 넣고 갈 때도 있고

바다와 산을 넣어 갈 때도 있다

이제 엄마는 밀가루 쌀 야채 생선 같은 것은 상대 안 한다

엄마는 지구라는 큰 시계를 갈아 초침을 만드는 것처럼 큰 것만 간다

다 분쇄해선 나에게 한 컵 주지도 않고

호스피스 할머니들하고만 나눠 드신다

 

그게 무슨 묘약이라고

 

내가 그 간 것을 훔쳐 먹었더니

몸이 뜨거워지고 온몸이 바스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막 동굴의 박쥐가 되는 느낌이 이럴까

죽기 전에 이미 죽게 되었고

나무 산 바다가 이미 친구가 된 느낌이 들었다

흰 눈의 사전엔 희다라는 말이 없었고

파란 바다의 사전엔 파란이 없었다

흰 눈과 바다에 대한 나만 아는 앎으로 몸이 가득 차올랐다

안경을 다시 쓰면 이 모든 게 꿈이라고 할까 봐

안경을 벗었다

모든 단어의 문장은 한 음절로 치환되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자음을 버린 모음 한 개였다

 

모음 한 개가 방 하나를 빈틈없이 가득 채웠다가

다시 다른 모음 하나가 방을 채웠다

 

세상에는 모음 외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