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물속의 사막 / 기형도

주선화 2022. 12. 6. 10:58

물속의 사막

 

-기형도

 

 

밤 세시, 길 밖으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마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수잎 흘러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흰 개는

그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와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차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 빛은 터진다

미친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