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초록 대문 점집 / 이잠

주선화 2023. 2. 3. 09:36

초록 대문 점집

 

-이잠

 

 

卍 자 깃발이 꽂힌 초록 대문 집 할머니는 붉은

대추 켜켜이 쌓인 제단 앞에 한쪽 무릎을 세우

고 앉아 있었다

 

계속 이러고 살겠습니까

팔자를 고치겠습니까

 

다짜고짜로 묻는 손님 얼굴 찬찬 뜯어본 뒤 엄

지로 네 손가락을 맞춰 가며 생년월일난시를

적었다

 

잔나비 띠에 섣달 초나흘 술시라

 

그림인지 글씨인지 숙명인지 눈보라인지 모를

기운을 휘몰아 써 내려가다가 할머니는 문득

손을 멈추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참 답답해

 

순간, 몸의 후미진 귀퉁이가 허물어지며 뜨끈

한 것이 왈칵 쏟아졌다 생판 모르는 사람 앞에

서 난처하게, 난처하게

 

다 내려놔, 가벼워져야 살아

 

석양의 보랏빛 구름 한 세트를 떠올리며 내려

놓는다는 말은 구름에 추를 매달지 않는 거와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앞이 꽉 막힐 때마다 일이 술술 잘 풀리지?

그게 다 조상 할머니가 돌봐 주는 공덕인 줄 알

 

명절날 점방에 앉아 맥없이 눈물 떨구다가 어

느 혼이라도 내 편이 있다는 말은 흐뭇이 들려

속이 허여멀건해지는 것이었다

 

답답할 때 또 오노

 

백발의 할머니 초록 대문을 열어 저녁 어스름

을 저만치 밀어 놓았다

포장 들러처진 신곡시장통을 걸어 나오다 문득

뒤돌아보니 집도 절도 할머니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저녁 하늘에 공터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