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저라는 것 / 이선영

주선화 2023. 2. 14. 12:55

저라는 것

 

-이선영

 

 

사과가 저를 벌레 먹은 사과라고 여길 때는

옷이 저를 좀먹은 옷이라고 실쭉할 때는

꽃이 저를 시든 꽃이라고 비아냥할 때는

못이 저를 녹슨 못이라고 손가락질할 때는

주전자가 저를 찌그러진 주전자라고 비웃을 때는

변기가 저를 더러운 변기라고 조롱할 때는

 

아직 저를 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터지고 깨져도 저라는 게 있다는 것이다

저대로 저 나름으로 오물딱조물딱

살아갈 이유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보라,

구멍 숭숭 뚫린 채 굴러가는 나뭇잎을

말 못하는 앵벌이의 발 없는 손을

쪽방촌 사내의 말없는 숟가락을

오래 앓아 누운 노인의 퀭하니 비어 있는

눈빛과 말라붙은 입술을 

 

없는 것이다

텅 빈 것이다

그저 귀 기울여야 할 숨소리와

따라가야 할 몸놀림밖에

저라는 건, 저 같지 않다는 건

이미 먼데 두고 내린 물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