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2023년 시산맥 신춘문예 당선작 중 일부

주선화 2023. 2. 17. 10:40

지극히 사소한(외 2편)

 

-서이교

 

 

  창문으로 빗방울이 자늑자늑 붙었다 스카프는

벤치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고 모자는 사랑을 하고

싶다고 하고 나는 매일 밤 집을 짓는다고 했다

 

  루가 어깨를 털며 들어왔다 스카프는 묶인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하고 모자는 빈 천장을

보는 것이 싫다고 하고 나는 그냥이라고 하자 나의

이유 없음이 더 문제라며 이름 붙이기를 

계속하자고 했다 스카프는 휴식 모자는 수줍음

나는 자유 루는 캥거루

 

  루는 캥거루를 보러 호주로 가는 꿈을 자주

꾼다고 하고 린은 스카프를 두르면 플라타너스의

속삭임이 들릴 것 같다고 하고 빈은 쓸쓸할 때

모자를 써야겠다며 수줍게 웃는다 이름을

이어가는 동안 빗방울이 세차졌고 호수는 제몸을

불리며 더 많은 빗줄기를 받아내고 있다

 

  린 스카프 휴식

  빈 모자 수줍음

  나 장갑 자유

  캥거루

  커진 품에서 이유들이 잦아들고 불어난다

 

  오후 다섯 시 저녁이 서둘러 온 듯 보이지만

휴식은 화색이 돌고 수줍음은 자꾸 이마를 만지고

캥거루는 힐리어 호수*에 대해 말한다

 

  힐리어 호수를 생각하자

  분홍이 따라오듯이

 

  우리는 되어가는 중이다

 

*호주에 있는 분홍색 호수

 

 

 

마루

 

 

누구라도 움직이면 사이가 됩니다

햇빛이건 고양이건 모자이건

 

어디서부터 온 건지 별이 뜨겁습니다

고양이가 졸린 눈으로 그늘에 찾아들고

모자가 바람을 밀고 나옵니다

마주보던 문이 어긋날 맨 찬바람이 생하게 불지요

 

손가락으로 빗금을 만져보고

등으로 별을 가려주고

발바닥의 안녕을 살펴보며

어두워서 서로가 보일 때까지 기다려 줍니다

 

나는 그 사이에 삽니다

따라가지 않는데 흘러가기도 하고

움직이는데 머물러 있기도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사는 일이에요

귀퉁이가 부서지고 색이 바랠수록 우리는 둥글어지고

밝아지면서 깊은 강이 흐를 테니까

 

그림자가 마당을 밀고 나가네요

빛에 베인 담장이 어둑해지고

모자가 저녁을 쓰고 옵니다

 

날이 갈수록 나는

자꾸만 삐거덕거립니다

아는 사실에서 모르는 일이 되어갑니다

오늘이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죽은 새와 내게서 날아간 새

서 있는 나와 그런 나를 두고 가는 나에 대하여

 

그러나 오늘과

그래서 오늘의 사이를 삐거덕대며 오래 걸어

보는 것 입니다

 

 

 

시접

 

 

꿰매 놓은 그늘이 쏟아진다

 

쥐고 있던 길이 땀을 놓자

지나온 시간들이 주르륵 쏟아진다

 

이사를 하고 창문에 맞춰 커튼을 잘랐다 잘려

나간 자리에 실을 뽑아 홀매를 치고 반은 서랍에

넣어두고 남은 것은 그늘에 걸었지 화단에 심어

놓은 자두나무가 서서히 말라갔다 바람이 불면

금이 간 마당이 비틀거렸고 비가 오면 태풍이 불

듯 방 안까지 물이 들이쳤다 그럴 때면 없는 별을

찾아 빈방을 만들고 각자의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커튼처럼

 

중심인지 경계인지 모를 길을 걷다가 부은

다리를 끌고 집으로 가는 길, 별들이 달의

살빛으로 둘러앉으면 두고 온 자두나무가 몸을

흔들고 서랍에 넣어 둔 커튼이 꿉꿉한 냄새를 내고

손톱 밑의 그늘은 더 깊이 숨곤 했다

 

해진 가슴에 올을 주워 시접을 댄다

 

구겨질 때마다 빛났던 침묵이

맞닿은 주름에서 일어서고

늘어난 너비만큼 침묵도 가난도 이해되는 폭이 생긴다

 

오늘도 비가 온다

 

흙이 뿌리를 감싸는 것이 아니라

엉킨 뿌리가 흙을 잡아주고 있다

말라가는 자두나무에는

반복되는 고요가 저의 심장을 더 멀리 가게하고

커튼 안쪽에는 끝내 자라나는 생활이 있다

 

그런 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