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분홍이 잘 익어가는 동안 (외 1편) / 김밝은
주선화
2023. 3. 14. 11:43
분홍이 잘 익어가는 동안 (외 1편)
-김밝은
어릴 적, 선머슴처럼 뛰놀다가도 노을을 걸치고 날아가는 새떼를 보면
얼굴도 본 적 없는 아버지가 생각나곤 했는데 할머니는 봄이면 진달래
꽃을 따다 술을 부어 꽃밭 귀퉁이에 묻어놓고 봄날의 향기로 무르익을
때까지 들여다보곤 했다
개구리 소리가 마당까지 올라오기 시작하면 할머니는 잘 익은 분홍을
술잔에 담아 상을 차려놓고는 나쁜 놈 나쁜 놈, 질펀한 목소리로 허공을
휘저었다 그런 날은 유난히 반짝이는 밤하늘이 손을 뻗으면 잡힐 것만
같아서 나쁜 놈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얼굴이 더 궁금했다
상상은 또 다른 상상을 건드려주곤 해서 혼자 있을 때는 하늘에 가닿는
비밀을 키우며 두근거리던 날들이 있었다 한번쯤 꼭 만져보고 싶던 얼굴
세상의 간절함을 모두 모아서는 마주할 수 없는 얼굴이 있다는 것을 터
득해버린 후 쑥쑥 자라던 상상력은 산산조각이 났고 나도 가끔 고개를 숙
인 채 나쁜 사람 나쁜 사람 곱씹어보는 날들이 늘어갔다
새까만 울음을 박박 문지르면 맑은 눈물이 될까 생각하는 사이 모른 척
고개를 돌리던 슬픔이 잠깐 윤슬처럼 반짝일 때도 있었다
폭설, 사람의 온도를 갖고 싶다니
우크라이나로 돌진한 침략자처럼 무자비한
눈발이 휘몰아치고 간 뒤
나무 한 그루
바라보는 집 한 채
눈 속에 옴팡지게 들어앉아 있는
남녁의 풍경 하나를 올려보내 왔다
저토록 고립무원에 홀로 갇히면
사람이 다시 사무치게 그리워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