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갈색의 책 / 이제니

주선화 2023. 4. 11. 10:02

갈색의 책

 

-이제니

 

 

나 혹은 너는 나무 숲에서 오래된 책 한 권을 발굴했다

나무숲은 꼭 갈색일 필요는 없다 아주 희미한 갈색의 암시 정도만

먼지와 빛의 깊이를 지닌 고고학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해두자

 

누군가 경건한 얼굴로 문장을 읽어내려갔다

행간과 행간은 지독히도 넓었고 침묵 또한 꼭 그만큼 벌어졌다

 

정말 가슴 아프게도 들리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소리내서 말할 리 없잖아

 

꿈에서 깼을 땐 단 하나의 단어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니,

흔들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기억하는 얼룩과 네가 기억하는 얼룩

흰 것 위에 검은 것, 검은 것 위에 흰 것

 

벌레 먹은 나뭇잎 구멍 사이로 오후 네시의 햇빛이 스러지듯이

보도블록 깨진 틈 사이로 모래알들이 쓸려 들어가듯이

 

누구든 좋으니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아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떨어져나간 겉장, 제목도 없는 책

나는 일평생 나라는 책을 읽어내려고 안간힘 썼습니다

 

갈색의 갈색의 갈색의 책

 

무슨 말이든 하세요 그러면 좀 나아질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침묵하는 법을 배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