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허공이라는 것 / 엄원태
주선화
2023. 5. 15. 16:58
허공이라는 것
-엄원태
화살나무 가지는 촘촘하다
곤죽박이가 날렵하게 파고들어 꼬리를 까닥인다.
가지가 순간, 흔들렸던가.
수수꽃다리 가지는 성글다.
쇠박새가 무심한 몸짓으로 앉았다가 훌쩍 날아간다.
가지는 미동조차 없다.
곤주박이 앉았던 자리보다
쇠박새가 앉았던 자리가
더
말갛다.
조금 더 비어 있다.
비어 있던 가지였는데
새가 앉았다가 떠난 뒤에야
더 말갛게,
헹궈 낸 듯 비워 낸 게 보인다.
새는 그렇게
저들의 자취를 허공에 남긴다.
생애生涯라는 건,
원래부터 비어 있는 단애斷崖를
비로소 마주하고,
온몸으로 통과해 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새는 노래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울지 않고, 다만 여문 부리를 깨물다 떠난 것으로
허공을 한 번 더 헹궈 낸 것이다.
세상 노래를
다 한 것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