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파문을 씹는 몽돌(외 1편) / 정영선

주선화 2023. 5. 18. 09:42

파문을 씹는 몽돌(외 1편)

 

-정영선

 

 

바닷가에서 몸을 다진 몽돌은 파도를 먹고 산다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다갈다갈 파문을 씹는 어금니 소리

 

거친 파도엔 닥다그르 배꼽 웃음 웃어젖히는

 

뼛속 깊이 응축된 닥닥한 자존이

세파에 부대끼며 모서리가 닳아

잘 다듬어진 목청으로 걸어 나온다

 

천 년을 쏟아내고도 짱짱하게 살아 있는 소리의 몸

 

밤이면 둥근 세월 포개 누운 몽돌밭에

달빛이 자늑자늑 뭉툭해진 세월의 귀를 쓰다듬는다

 

 

 

가난에게 묻다

 

 

좁은 골목

가난이 살다간 흔적 팽배한

엉거주춤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기울어져 가는

빈집

녹슨 철문 투덜대는 혼잣말에

돌쩌귀 내려앉은 삐딱한 방 문짝 사이로

웅크리고 있던 고독의 퀭한 눈알

빠끔, 내다볼 것 같은

담벼락 꽂힌 깨진 유리병 섬뜩해도

길고양이 새끼 품어 안식 일구고

적막에 그물 친 거미의 기다림 느긋하다

늙은 살구나무 잇속 환하던 꽃자리엔

사랑이 달게 익고

웃자란 잡초 무성한 외로움에

장독가에 퍼질러 앉은 원추리 꽃대 밀어

붉은 신분 밝히고 서서

똬리 튼 우울을 타진하며

명치까지 차올랐던 궁핍 저편을 더듬는다

 

 

 

ㅡ 정영선 시집 2023년 5월 "바람이 마두금을 통과할 때"

ㅡ 현대시 기획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