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몸의 기억력 / 이주언

주선화 2023. 7. 19. 09:13

몸의 기억력

 

-이주언

 

 

햇살이 은사처럼 감겨있는 목련나무의 몸에는

이제 막 떠난 꽃잎의 몸이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첫 만남의 설렘과 하얀 웃음과 뾰로통한 향기가

나무의 껍질과 물과 자궁벽에 또렷이 새겨져 있다

 

새의 발가락엔 꽉 붙잡았던 나뭇가지의 질감이

내 몸에는 아버지에게서 풍겨나던 갯내음

배를 쓰러주시던 할머니의 꺼칠한 손바닥

네 몸의 문장들이 음각되어 있다

 

몸이 받아 적은 것들은

작은 파문이 일 때마다 절로 살아나

천 년 전 주법을 기억하는 박물관의 악기처럼

 

달빛의 어조로 바람의 문법으로 때론 칼금무늬로 음각되어

목련은 목련나무의 몸속에

그들은 내 몸속에 욱식거리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