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 이승희

주선화 2023. 8. 1. 09:38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이승희

 

 

작약 속을 걸었다

작약이 없다

작약이 아닌 것들만 가득했다

죽는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거기와 이곳의 사이는 없고

환상이라고 하면 환상이 이미 환상이 아니다

 

여기는 한 번쯤 죽어야 올 수 있다는 말을 지독하게 혐오했다

 

물고기가 바라보는 곳을

새 한 마리도 바라본다

나도 그곳을 바라본다

모두 다른 곳인데 한 곳에 있었다

 

작약이 거기 있다

허공에 뿌리를 두고

꽃을 물속에 두었다

누가 밀어 넣었을까

누가 밀어 올렸을까

어떤 반성과 참회가 꼭대기를 흔들었다

내가 혐오하는 말은 모순일지도 모른다

 

무수하게 산란하는 물고기들이

내 얼굴을 스쳐 간다

 

작약 속을 걸었다

작약이 없다

이 모든 게 작약이 되는 날이 온다는 말을 혐오한다

치욕스러웠고

슬펐다

 

반복되는 작약

 

피가 물 속으로 퍼져갈 때 작약꽃이 피었다

 

나는 집을 만들 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