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다정한 익명 / 구수영
주선화
2023. 8. 4. 11:04
다정한 익명
-구수영
쫓기는 꿈을 꾼다 왜 쫓기고 있는지
누가 쫓고 있는지도 모른 채
추격자는 빠르고 나는 마음만 급하다
숨을 곳 없는 벌판에서 마주한 표정 없는 얼굴
어두운 목소리
내가 네 아버지야 이 사람은 네 어머니고
그럴 리가 없다고 나는 앞에서 부화된 새
라고 외치다 깨났다
온몸 촘촘하게 돋아 나는 땀
어쩌면 이렇게 많은 구멍이 있을까 나는
구멍으로 지어진 집
술술 새는 머물 수 없는 집
벌레의 놀이터로 내준 달팽이관
사각사각 윗니를 파먹은 익명의 벌레
익명은 익명을 낳고 익명이 자라고
익명이 생일을 맞고 밤을 새우고
거미줄을 치고 덫을 만들거나 숨고
걸려들고 파닥이고 죽거나 탈출하거나
어떤 익명의 소식에도 익숙해진 어느새
꿈이어서 다행이다
그가 누군지 몰라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