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묵의 평전 / 이봄희
주선화
2023. 9. 18. 09:39
묵의 평전
-이봄희
묵은 펄펄 끓는 것으로 살고
차갑게 식으면서 죽는다
어디에 부어지든 그곳이 관이다
관의 형상으로 굳으므로
그에게 생전의 모습이란 없다
단 하나의 뼈도 없으면서
야들야들 골격을 유지한다
한때 앙금의 힘으로 버텨야 하는
푸석한 날들이 있었다면
가파른 여름의 끝에서
끈덕지게 달여야 미끈하던 응어리
엄지손가락이 푸른 물로 고여든다
이렇게 조심스러운 끼니가 있을까
이처럼 힘없는 낭패가 있을까
작물의 대궁들이 허리까지 숨기면
못 박인 손길이 더욱 바빠진다
풋 여문 알들, 우리들의 공복은
진하게 무르익을 때를 기다린다
구부러지고 늙은 뼈를 화장한 뒤
묵 한 사발 시켜놓고
컬컬한 울음의 뒤끝을 꿀꺽꿀꺽 삼킨다
죽은 목숨이든 산목숨이든
젓가락 사이에서 묵은 생물이다
누군가의 관을 들 때 묵을 집듯
조심스러운 손길에 따라
열매에서 가루가 되고
가루는 팔팔 끓어 넘치다가
다시 하얀 사발에 담겨 굳어가는
저 한결같은 묵만 같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