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네가 미로 속을 헤매고 있을 때 / 박판식

주선화 2023. 12. 13. 16:01

네가 미로 속을 헤매고 있을 때

 

-박판식

 

 

중년이라는 인생의 새벽은 장급여관 같다

별들의 광기로 잔치는 끝났고 나는

멸균된 물처럼 실린더 속에서 출렁인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플라스틱 나이프로 슬픔을 자르고

잡동사니 같은 추억을 버리고

오층석탑의 삼층쯤에서 올해는 7월의 당신 기일을 잊는다

당신을 더 그리워하는데

10년 만에 다시 본 CGV 1층 마네킹이 늙어서 놀란다

내가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은 일

할 수 없었지만 하려고 했던 일

인생은 그런 것들로 물결친다

평범한 인생, 멍든 얼굴들

작은집의 개가 죽고 석 달 뒤에는 아이가 생긴 큰집

나는 당신을 후생에 사랑하려고 어껴두었어

그런 수작이 통할 리가 없다는 것을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아들이 잘생기고 못생기고는 어머니 솜씨에 달렸다

아홉 살까지만 지켜보아도 인생의 가장 좋은 추억

세 가지 중 한 가지는 날린 셈이다

죽음이 내 앞으로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다

강풍이 언덕의 나무를 뽑고 사람들은 죽어가느라 바쁘다

인생이라는 얇은 바다

나는 감자튀김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는

허기진 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