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다행히 식물도감을 갖고 있지 않아서 / 최휘
주선화
2023. 12. 27. 10:58
다행히 식물도감을 갖고 있지 않아서
-최휘
우린 아무 풀이나 뿌리채 뽑아 책갈피에 재우는 습관이 있어요
그런 습관 때문에 얼마나 많은 풀들이 말라 부서졌는지 몰라요
여름의 책들은 반서반초가 되었구요
페이지를 넘기면 무수한 계절이 있구요
어떤 페이지는 온통 겨울이구요
어떤 페이지는 활짝 핀 봄이구요
우리는 책의 속으로 죽은 꽃을 쑤셔 넣는 자
죽은 꽃과 죽은 풀들과 꿈꾸는 자
다행히 식물도감을 갖고 있지 않아서
풀과 꽃들의 이름을 잘 몰라요
대신 풀과 꽃 사이에서 잠들죠
그때마다 죽은 풀들의 꿈을 꾸죠
풀과 커플이 된 낱말들
꽃과 결혼한 이야기들이 머리를 외로 꼬며
거기가 어디더라
아 벚꽃
맞아 대성리에 가면 말야
이렇게 시작되는 말들과 놀아요
벚꽃과 대성리는 부적처럼 붙어 있죠
여뀌와 청평은 한 이불에서 잠들죠
이맘때쯤 커플이 된 그 말들이 우리를 유혹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