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드라이클리닝 / 김이듬
주선화
2024. 2. 17. 10:05
드라이클리닝
-김이듬
자네의 망가진 인생이 나를 감동시켰네 고통에
일그러진 자네 얼굴에 반했어 이리로 오게 자네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내게 자네의 목소리를
들려주게 더럽고 쉬어빠진 묵소리군
알겠어요 시작하죠
그 늙은 여인은 오래된 대저택에 살았다 나는
그녀에게 매달 고통 일 그램을 팔았다 보통은 일
그램이었지만 그녀가 실비아 플라스를 흉내내고
싶어했던 겨울 초저녁엔 두 배의 양을 팔아야 했다
말하다가 어지러워서 마루에 쓰러질 때도 있었다
설날도 가까워졌으니 선물을 주겠네 이 모피
코트가 맘에 드는가? 자네의 비쩍 마른 어깨를
감싸줄 걸세 자네는 기교를 부리지 않을 때가
더 나아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치렁치렁한 은빛 모피 코트 자락을 끌며 나는
계단을 내려왔다 그녀의 응접실에서 마당을 지나
대문을 나오는 동안 나는 노파가 되어 갔다 고통을
다 팔았을뿐인데 슬픔도 기쁨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네 다리처럼 움직이던 감정이 제로가 될 수도
있구나
나는 알겠다 알아서 알겠다고 말할 수 있을 때가
오면 좋겠다
습설이 쏟아지는 밤이었다 나에게 닿자 흰빛이
사라지는 무거운 눈이었다 나는 눈보라에
뒤덮이며 붕괴되는 저택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