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밥 / 이문재

주선화 2024. 5. 31. 13:37

밥 

 

-이문재

 

 

시계에 밥을 주던 시절이 있었다.

손목시계는 하루에 한 번

괘종시계는 한 달에 한 번

 

하루 한 끼 배불리 먹기 힘든 시절

하루에 한 번 손목시계에 밥을 줬다.

월급을 받지 않으면 식구들 굶던 시절

한 달에 한 번 괘종시계에 밥을 줬다.

 

밥 주는 시계가 사라지면서

시계는 오래갔지만

자동으로 오래가고 정확해졌지만

시계는 죽어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완전히 죽고 나서야

건전지를 먹을 수 있었다.

 

시계가 밥을 먹지 않게 되면서

밥을 먹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진짜로 건전지가 떨어진 사람들

건전지가 떨어져도 구할 수 없는 사람들

누가 건전지를 갈아 끼워줘도

살아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시계에 밥을 주던 시절이 있었다.

하루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그래도 못 미더워 시계가 가는지

귀에다 갖다 대고 째깍째깍 소리 들어보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괘종시계 바늘이 9시 근처에서

못 올라가는 기색이 보일라치면

식구 중에 먼저 본 사람 얼른 일어나

까치발을 하고 태엽 끝까지 감아주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