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표적 / 안희연

주선화 2025. 2. 15. 10:47

표적

 

- 안희연

 

 

얼음은 녹기 위해 태어났다는 문장을 무심히 뱉었다

녹기 위해 태어났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녹고 있는 얼음 앞에서

또박또박 섬뜩함을 말했다는 것

굳기 위해 태어난 밀랍초와

구겨지기 위해 태어난 은박지에 대해서도

 

그러려고 태어난 영혼은 없다

그러려니 하는 마음에 밟혀 죽은

흰쥐가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흰쥐, 한 마리 흰쥐의 가여움

흰쥐, 열 마리 흰쥐의 징그러움

흰쥐, 수백 마리 흰쥐의 당연함

 

질문도 없이 마땅해진다

흰쥐가 산처럼 쌍여 있는 방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잘 수 있게 된다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거라고

어름이 된다는 건 폭격 속에서도

꿋꿋이 식탁을 차릴 줄 아는 거라고

 

무엇이 만든 흰쥐인 줄도 모르고

다짐하고 안도하는 뒤통수에게

 

넌 죽기 위해 태어났어

쓰러뜨리기 위해 태어난 공이 날아온다

당연한 말이니까 아파할 수 없어

불길해지기 위해 태어난 까마귀들이

전신주인 줄 알고 어깨 위에 줄지어 앉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