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상반기 시와 반시 신인상 당선작
이 여름의 보색 관계 (외 2편)
- 김래이
열 손가락으로는 아쉬워 열 발가락까지 찧은 봉숭아 꽃잎을 올린다
손톱보다 꽃잎을 짓이긴 엄지와 검지에 난리가 나고
다시없을 불가능한 계약서 한 장이 있다면 거기 콱
이 여름의 지장을 눌러 찍고 싶다
근데 아빠는 시간의 계약서를 읽기는 한 걸까
왜 손톱, 발톱은 있으면서 평평한 등에는 등톱 같은 건 없을까
배톱이 있다면 가슴만 가린 나시를 입고 거기에 갈 거야
가서 빨갛게 물든 배톱을 보이며 풀을 뽑을 거야
빨간색은 벽사의 의미라는데
그래서 봉숭아를 집 울타리에 심었다는데
담벼락에 모여 난 봉숭아를 피해 풀약을 쳤다는데
때가 되어 피고 때가 되어 지는 봉숭아 꽃의 때를
거스르고 싶어
한 웅큼 따다
손톱 발톱 위에 올린다
아빠에게 갔다
꽃도 없이 봉숭아 꽃을 보여주려고
잔디 사이에 난 뽑고 있는데
풀색과 손톱이 보색 관계였다
첫눈이 올 때까지 남아 있을까
새로 나는 손톱이 봉숭아물을 밀어내고
손톱을 깎을 때마다 여름이 잘려나간다
아빠와 한 번 더 멀어진다
바니타스
봄은 오면서 가는 것 같다고 당신이 말할 때
벚꽃은 날아가면서 사라진다고 나는 말했죠
거리는 잘 차려 입은 사람들로 가득한데
사진을 찍을 때만 걸음을 멈추죠
한 여자가 줄기를 잡아채 볼에 가져가죠
여자의 친구가 바통을 넘겨받고
잡아당길수록 벚꽃은 자꾸 돌아가고 싶죠
허공으로
하관을 쓰고 날개옷을 입고 하나 둘 셋 소리에
얼어붙는 요정들이 있어요 꽃 같은 건 관심이 없지만
요정의 흔적은 남겨서 하원해야 된대요
나무는 정물일까 동물일까 당신이 물을 때
공중에서 밝은 건 땅에서도 밝다고 나는 답하죠
네 사람이 한 나무 아래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어요
사진첩에 담긴 같은 풍경이 우리를 더 닮게 하나요
한 장 두 장 아름다운 건 저장하고 싶어요
자꾸 절단하고 싶어요
이게 다 벚꽃이라는 계절 때문이죠
가서 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계절이 있죠
바니타스 바니타툼 옴니아 바니타스*
당신이 그랬나요
하지만 헛된 것은 중독성이 강해요
언제 한번 보자는 인사처럼
파도가 모래성을 훔쳐가는 속도일까요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 말이죠
걷듯이 안 걷듯이 서듯이
내가 당신에게 가는 속도인가요
한때는 허물어지는 것에 감탄하고 싶어요
공중에서 밝은 건 땅에서도 밝다고
수챗구멍은 잠시 꽃바구니가 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시인의 먹방
헐값에 참외를 여러 봉지나 샀다
참외 먹방을 해볼까
참외 먹방을 하려면 몇 개를 먹어야 할까
몇 개를 먹어야 놀란 사람들이 걱정하다
만족하며 지켜볼까
얼굴처럼 깊은 밥그릇으로도 모자라
봉분 높이로 먹은 밥심의 민족답게
얼마나 먹어야 경악한 사람들이 좋아해줄까
같은 것을 많이 먹으면 대단한 일이 되는데
같은 것을 오래, 오래도록 먹으면 알 수 없는 일이 된다
시인의 먹방 말이야
곱창 40인분, 쌀국수 3키로 또는 라면 10봉지
그 정도로는 안 되지
한글을 떼기 전에 잃은 한 사람을 평생 졸여 먹고 끓여 먹고 쪄 먹을 수 있다
곱창을 먹고 나면 빈 접시가 남는데
한 사람을 먹고 나면 접시가 커지고
딸기에 딸기맛 사과에 사과맛
그런 맛은 없고 맛은 슬픈 맛이 오래 씹기 좋고
씹을 때마다 단물이 차는 껌처럼
질겅질겅 씹다 보면 문득 부푸는 것이 있다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다
풍선이 부푼다
엄지손톱만한 풍선은 나를 들어올리고
바닥이 멀어지고 새들은 지나가고
집이 희미해지고
풍선은 나를 달고 하늘을 날아가는데
질리지 않는 맛을 씹었을 뿐인데
나는 말풍선에 낚인 한 마디 말처럼 계속된다
둥글려 혀 아래 둔 걸 꺼내 씹으면
풍선 안에 풍선을 볼 수 있다
풍선 안에 더 작은 풍선이 태어나고
그 안에 좀 더 작은 풍선이 그 안에서
더 작은 풍선이
나를 들어올린다
두 손을 휘젓고 발버둥을 친다
그러거나 말거나 풍선의 미늘은 내 입 깊숙이 박히고
나갈 수 없을 때 안으로 더 안으로
말풍선을 입안으로 삼킨다
풍선 안의 풍선들 한꺼번에 먹어치운다
이제 바람만 스쳐도 몸이 부풀고
복어처럼
나를 죽이지 않는 독을 품고
독은 품고만 있어도 소문이 나지
목숨을 걸지 않아도 같은 것을 오래, 오래도록 먹으면
걸리는 것이 있다
*당선작 10편 중 3편